"난 때로 더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너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딸 로즈를 향해 이런 말을 쏟아내는 모랑 부인은 삶이 너무나도 괴롭다. 뉴욕 빈민 아파트의 삶, 거칠고 강압적인 남편, 철없는
딸과 아직 어린 아들, 모랑 부인은 그 삶에서 탈출을 꿈꾼다. 어디 모랑 부인뿐인가? 찌는듯한 무더위에 집안에 머물 수 없어서
죄다 밖에 나온 모랑 부인의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Ain't It Awful, the Heat?'로 이
놀라운 미국 오페라는 시작된다. 'Street Scene'은 쿠르트 바일(Kurt Weill, 1900-1950)이 미국 극작가
엘머 라이스가 쓴 동명의 희곡(퓰리처 상 수상작)을 원작으로 1947년에 만든 오페라 작품이다. 대본은 미국의 흑인 작가 랭스턴
휴즈가 맡았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음악극(Singspiel) '서푼 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 1928)'로 잘 알려져 있다. 유대인인 그는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1935년의 일이었다. 미국에서 살면서, 그는 자신이 이전부터 작업해온 'Singspiel(독일어로 된 음악극)'을 새롭게
갱신한다. 영어와 미국의 정서를 결합시킨 '미국 오페라(American Opera)'가 그것이다. '미국 오페라'라는 명칭은
쿠르트 바일이 붙인 이름이지만, 1935년에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인이 만든 3막의 영어 오페라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가 그 앞에 자리하고 있다. 거슈인이 보여준 재즈와 오페라의 놀라운 결합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바일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독창적 형태의 미국식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오페라'라는 명칭을 쓰기는 하지만, 관객들은 'Street Scene'을 보면서 이것이 뮤지컬인가 오페라인가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된다. 바일은 기존의 서양 음악을 대표하는 오페라의 모든 문법에 도전한다. 영어로 쓰여진 대본에 현대 음악과 미국의 재즈,
블루스의 음률이 덧입혀진 노래가 흐른다. 주요 등장 인물만 30명이 넘고(총 50명에 이르는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대사와
춤, 노래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내가 본 2018년의 영국 연출가 팀 머레이의 마드리드 왕립 극장(Madrid Teatro
Real) 공연 버전은 세트도 독창적이다. 4층의 철골 구조 아파트 세트가 양쪽으로 갈라지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뉴욕의
화려한 빌딩숲이 펼쳐진다. 보는 내내 머릿속으로 프로덕션 비용을 헤아려 보게 된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푹푹 찌는 무더위의 어느 날,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맨해튼 뒷골목 아파트에서 여자들은
더위를 견디려고 집 밖으로 나와 있다. 그들은 이웃들의 흉을 보며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랑 부인이 우유 배달부
생키와 바람난 것이 여자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프랭크 모랑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며 거친 언사를 쏟아낸다. 괴로운 모랑 부인은
과거의 꿈과 희망을 되새기며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지만, 딸 로즈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아들 윌리는 심한 장난꾸러기이다.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착하고 성실한 샘은 로즈에게 구애하고, 두 사람은 빈민가를 떠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그러나 로즈의 아버지
프랭크가 아내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서 극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엘머 라이스는 이민자들의 꿈과 희망을 맨해튼 빈민가 아파트에 투사한다. 이태리 이민자 피오렌티노가 자유의 여신상의 횃불을
아이스크림으로 비유하며 주민들과 함께 부르는 1막의 노래는 흥겹다. 골라먹을 수 있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은 값싸고 달콤하지만,
현실의 하층 이민자로서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치 극 전체를 지배하는 숨 막히는 더위처럼 일상의 가난도 그들을 괴롭힌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샘은 변호사를, 로즈는 브로드웨이 스타를 꿈꾼다. 딸을 어렵게 예술 학교로 보내서 졸업시켰지만,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싱글맘 힐데브란트 가족. 그들이 떠난 아파트에는 곧 새로운 이민자 부부가 도착한다. 지저분한 뒷골목에서도 새
생명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뷰캐넌 부부는 산고 끝에 딸을 얻는다. 그런가 하면 예기치 못한 죽음도 있다. 'Street
Scene'의 1920년대의 뉴욕 맨해튼은 가난한 이민자들의 역동성으로 가득찬 당시 미국의 축소판인 셈이다.
이 극의 제목은 우리말로 '거리의 풍경'으로 번역되었다. 번역 제목이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가난과 더위에
포위된 최하층 주거지를 면도날로 자른듯한 단면을 보여주는 극에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생각해 본다. 극 속에서 관리인 헨리가
양동이로 핏물을 하수구에 버리는 장면이 2번 나온다. 한 번은 출산 현장의 핏물, 또 한 번은 살인 현장의 핏물이다. 로즈에게는
선명한 핏빛 비극의 현장으로 기억되는 그 거리는 '수난의 거리'일 것이다. 엘머 라이스는 하층 이민자 가족의 비극을 통해 미국
현대사의 숨겨진 장면을 포착한다. 쿠르트 바일은 앨머 라이스가 잡아낸 그 장면들에 음악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 덕분에 서구의
오랜 음악적 전통과 새로운 나라 미국의 정서가 만난 'Street Scene'은 미국 현대 음악사의 뛰어난 성취로 남게 되었다.
*사진 출처: naxosdir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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