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감독의 1966년작 영화 '초우(草雨)'에는 서로의 신분을 속이고 만나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주불 한국 대사의 딸인
영희(문희 분)는 비오는 날 나갔다가 우연히 부잣집 아들 철수(신성일 분)를 만난다. 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그들은 각각 서로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 영희는 대사의 딸이 아니라 식모였고, 철수는 자동차 세차일로 먹고 사는 건달 같은 남자였다.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 감독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Moscow Does Not
Believe in Tears, 1979)'에도 그와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 공장 여공으로 일하는 카챠는 교수인 삼촌으로부터
여행 간 사이에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삼촌의 집은 혁명 광장 앞에 있는 부유층의 아파트이다. 카챠의 친구 류다도 함께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는다. 류다는 카챠와 함께 교수의 딸들로 자신들을 속이고, 알고 있는 인텔리 계층의 남자들을 불러모아
아파트에서 파티를 연다. 과학자, 유명한 운동 선수, 방송국 직원,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카챠와 류다.
그러나 짧은 쇼타임은 끝나고 그들에게는 다시 팍팍한 현실이 기다린다. 그런데 카챠는 그로부터 3개월 후, 임신한 것을 알게 된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1981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해외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은 소련
영화로 기록된다. 영화는 헐리우드 멜로 드라마의 내러티브 공식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모스크바의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는 세 명의
여성들은 각자 다른 삶의 행로를 걸어간다. 여자의 인생은 좋은 남자를 붙잡는 것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류다는 잘 나가는 운동 선수와
결혼한다. 미혼모가 된 카챠는 어려움을 이기고 학업을 마친 후 공장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 순박한 토샤는 농부의 아내가
되어 평범한 삶에 만족하며 산다. 영화의 전반부는 1958년의 시점에서 카챠, 류다, 토샤가 어떻게 사랑을 찾아가는지를 보여주고,
후반부는 20년 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중심 캐릭터는 카챠이지만 류다와 토샤의 삶도 비중있게 다뤄진다.
'여자 인생 뒤웅박 팔자'라는 옛속담이 있다. 뒤웅박은 박을 쪼개지 않고 작은 구멍만 내어 그곳에 씨앗이나 곡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그릇이었다. 한 번 잘못 들어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는 뜻으로 여자의 일생도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으로 쓰였다. 류다는 그런 신념을 신봉하는 매우 세속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빵 공장 여공은 교수 딸로 위장해서 유명한
운동 선수를 하나 나꿔챈다. 그리고 결혼에 성공하지만, 남자는 젊었을 때부터 있었던 술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알콜 중독자가
된다. 결국 류다는 이혼녀로 세탁소 점원으로 살아간다. 카챠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 루돌프에게 버림받는다. '야, 네가
조심했어야지,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해'를 시전하는 찌질한 마마보이한테 데인 뒤로는 괜찮은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 직업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카챠는 외롭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 시골 아낙으로 살아가는 토샤는 행복할까? 농사일이 대박
터질 일도 없고, 힘들게 아들 셋 키우며 그냥 저냥 살아간다. 20년이 지난 후, 세 명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남자가 드리운
그늘 아래에 놓여있다.
과연 여자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여성의 연애와 일에 대해 꽤나 구식의 관념을 강하게
투사한다. 제대로 된, 괜찮은 남자를 만나야만 여자는 비로소 완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고 외친다. 카챠는 전문직 여성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지만, 결혼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이혼남 고샤와 새출발을
꿈꾸는데, 이 남자는 마초 기질이 있어서 카챠가 자기 주장하는 꼴을 못본다. 그런데 고샤의 이런 기질이 영화 속에서는 '남자다운
것'으로 아주 잘 포장된다. 고샤는 카챠의 딸 알렉산드라의 남자 친구 문제를 주먹으로 해결한다. 그런 방식을 반대하는 카챠에게
'그런 딴지는 접어두지 그래'하며 훈계한다. 집안의 중심인 남자로서 카챠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영화는 당시 소련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 사회학적 자료로 쓰이기에 충분하다. 엘다 라쟈노프 감독의
'Office Romance(1977)'에서도 이와 비슷한 설정을 볼 수 있다. 통계국의 최고 책임자에 오른 나이든 독신 여성
루드밀라는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해 불행하다. 그나마 루드밀라가 뒤늦게 찾은 연인으로 나오는 아나톨리는 부드럽고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소탈한 남자다. 그와는 달리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의 고샤는 매우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카챠는
그런 고샤를 인생에 둘도 없는 배필로 여긴다. 그것은 국가 경제적 측면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제의 억압적 틀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련 영화 당국은 '통속적인 멜로 영화'라며 마뜩잖은 반응을 보였지만, 영화는 9천만명의 관객 동원을 이뤄내며 소련에서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역대 2위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세르게이 니키친이 작곡한 영화의 주제곡
'알렉산드라(Александра)'의 아름다운 선율이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부르짖는 소련의 구식 멜로 영화, 오늘날의 여성 관객이 '이런 걸 봐야해?'라고 물을 수도 있는 영화. 그럼에도
카챠와 류다, 토샤가 보여주는 인생의 행로들은 여성의 삶에서 남자와 결혼이 가지는 의미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유리구두 들고
찾아와서 신겨줄 왕자님은 현실에 없다. 영화 속 카챠가 보여주는 현실판 '짚신 찾아 삼만리'의 눈물겨운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짠한
구석이 있다. 고샤를 두고 '그런 남자는 세상에 없어'를 외치는 카챠,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카챠의 행복을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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