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검은 태양'의 결말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재즈를 좋아하지도 않고, 트럼펫도 불지 못하고, 노래도 할 줄 몰라. 그러니까 진정한 흑인이 아니지. 노예라구!"
고철이나 훔쳐서 겨우 먹고 살아가는 애송이 양아치 메이(Mei)는 재즈광이다. 식료품 구입하기도 빠듯한 처지에 재즈 음반들을
열심히 사서 듣는다. 동료와의 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고 탈영한 미군 병사 길(Gill)은 메이가 살고 있는 곳에 몸을 숨긴다. 곧
철거를 앞둔 오래된 교회 꼭대기가 메이의 집이다. 흑인 재즈 연주자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메이는 흑인 병사 길을 환대한다. 그러나
다리에 총상을 입고 쫓기는 처지의 길은 오로지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는 메이가 틀어놓는 재즈를 견디질 못한다. 급기야
메이가 아끼는 개 몽크를 죽게 만들고, 격분한 메이는 길에게 검둥이 노예라고 모욕을 준다. 기관총을 든 탈영병과 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좀도둑,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쿠라하라 코레요시(蔵原惟繕)
감독의 1964년작 '검은 태양(Black Sun)'은 여러모로 이색적인 영화다. 우선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요소는 재즈 음악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메이는 음반 가게에서 Max Roach의 음반을 산다. 비밥(bebop)의 선구자라고 할 수
Max Roach, 그의 강렬한 비밥 재즈가 영화를 휘감는다. 주인공 메이는 재즈에 반쯤 미쳐있다. 그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개의 이름은 재즈 연주자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에서 따왔다. 이 재즈 신도의 흑인에 대한 환상은
미군 흑인 병사 길에게 그대로 투사되지만, 도주 중인 탈영병은 메이의 기대를 산산이 부숴버린다.
이 영화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인종차별주의적인 관점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길의 총을 빼앗아 제압한 메이는 자신의 단골 재즈 클럽에
데려가기 위해 길의 얼굴에 흰색 분칠로 분장을 시킨다. 거리에는 수색 중인 미군들이 깔려있다. 정작 검문을 당한 것은 검은칠로
분장을 한 메이이다. 메이는 클럽 손님들에게 길을 자신의 노예라고 소개하고, 그들은 길을 서커스단의 원숭이처럼 억지로 춤을 추게
만든다. 그들이 흠모하는 재즈 연주자들은 사진과 음반 속에서 존재할 뿐이며, 현실의 흑인은 그저 열등한 인종으로 인식된다. 영화의
이런 장면은 일견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배제된, 인종에 대한 노골적 편견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클럽의 젊은 일본인들의 길에 대한 태도는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모습을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쿠라하라 코레요시 감독은 도시의 최하층 부랑자 메이와 흑인 병사 길을 하나로 묶는다. 영화
초반부에 강에서 건져지는 병사의 시신이 흑인인지 백인인지는 정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길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쿠라하라 감독은 영화 중간에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시위 장면을 몽타주로 제시한다. 조국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흑인을 대표하는 존재인 길은 낯선 이국 땅인 일본에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흰색 분칠로 자신의 피부색을 감추어야만 하고, 총상
입은 다리는 썩어들어가고 있다. 그는 연신 '엄마(mama)'를 중얼거리며, 메이에게 자신을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머물던 교회가 철거되면서 있을 곳도 없어진 메이와 죽음의 기운을 느끼는 길, 이 두 사람의 여정은 마치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1991)'를 떠올리게 만든다. 말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쌓인 적대감은 해소되고
둘은 연대감을 느낀다. 결국 바다가 보이는 곳에 도착한 메이와 길, 그곳의 풍경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가 넘실거리는
공장 부지와 접한 해안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공장의 옥상에 도달한다. 옥상의 대형 광고 풍선에 몸을 묶은
길은 메이에게 밧줄을 끊어서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검은 태양'은 인종간의 갈등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문화 충격을 비주류적인 감성으로 담아내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마무라 쇼헤이와 스즈키 세이준이 상업적인 관점을 놓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코레요시 쿠라하라는 자신의 독창성을 좀 더 우위에 둔다. 촬영 기법에서도 이 감독은 핸드 헬드를
여유있게 구사하며, 메이가 거주하는 비좁은 교회 공간도 효율적으로 포착한다. 그가 당시 닛카츠(日活) 영화사에서 태양족(太陽族)
영화를 찍으면서 체득한 젊은 세대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에서도 이어진다. 소비지향적이며 서구 문물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보여주는
전후 세대의 모습과 함께 미군정 이후 일본 사회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미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는다.
영어 자막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될 경우, 당연히 길의 대사 부분은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길의 대사가 단순하고 별로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도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이건 관객의 영어 실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영어 원어민의 리뷰를 읽어보면
길의 대사를 알아먹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길 역을 연기한 배우 치코 롤랜드(Chico Roland,
그의 본명은 Chico Lourant이다. 아마도 일본어의 영어 발음 때문에 로랑을 롤랜드로 바꾼 듯하다)가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는 배우로서의 발성이 전혀 되지 않으며, 부상병 역을 연기한다고 거의 뭉개지고 웅얼거리는 말투로 일관한다. 롤랜드는 당시 여러 편의 일본 영화에서 나름 조역을 담당했는데, 그 이력이 참으로 흥미롭다. 주한 미군 출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생계를 위해 트럼펫을 배워 재즈 연주자가 되었다. 쿠라하라 코레요시 감독은 그를 재즈 클럽에서 보고는 이 영화에 캐스팅했다. 감독의 요구대로 영화 속에서 롤랜드는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부른다. 어떤 면에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대사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몰입감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관객은 길의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메이의 입장에서 두 사람의 내적인 유대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낙오자가 비극적 최후를 향해 질주하는 영화 '검은 태양'에는 그런 뒷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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