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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광기의 발칸 서사시, 화약고(Cabaret Balkan, 1998)

  

  짙은 분장을 한 남자는 카바레의 무대에서 강렬한 음률에 따라 노래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고 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면서 묻는다. '여기 대체 왜 온 거야?' 그리고는 말을 이어간다. '지금부터 난 말이지, 댁들을 신나게 놀려먹을 생각이거든!' 어째 영화가 첫 장면부터 심상치가 않다. 휴일, 느긋한 마음으로 영화 한 편 보려는 사람은 이 영화를 피하는 것이 낫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100분 동안 분노와 광기의 홍수를 체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고의 감독 고란 파스칼리예비치(Goran Paskaljević)의 '화약고(Bure baruta, 1998)'는 마케도니아의 극작가 데얀 두코프스키의 희곡 'Powder Keg'를 영화로 펼쳐놓았다. 원작의 제목 대신에 'Cabaret Balkan'이라는 영문 제목을 쓴 것은 이미 'Powder Keg'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발칸 카바레'는 뭔가 급조된 제목 같지만,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카바레 가수가 중간 중간 목놓아 부르는 절규 같은 노래의 가사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1990년대 중반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배경으로 촘촘히 짜나간다. 그 시기 발칸은 보스니아 내전으로 불타고 있었다.

  베오그라드의 밤 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긴장시킨다. 등장 인물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양상은 다양하다. 부수고 때리는 물리적인 폭력부터 대부분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언어적인 폭력, 신체적인 위협과 살인, 강간 시도에 이르기까지 영화 내내 폭력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애송이 젊은이는 길에서 차 사고를 내고 도망쳤다가 집을 찾아온 차주의 복수를 경험한다. 그 아파트 지하에는 보스니아 난민 가족이 겨우 연명해가고 있다. 늙은 가장은 버스 기사로, 그 아들은 마약상의 똘마니로 살아간다. 전직 교수가 모는 버스는 늦은 출발에 분노한 사이코 청년에 의해 탈취당한다. 그 버스 속 승객들은 잠시 동안 지옥행 특급을 경험하고, 거기서 겨우 빠져나온 젊은 여자는 애인과 다투다가 둘은 마약상의 인질이 된다. 버스 기사의 아들은 그 인질극의 조연을 담당한다. 마치 작은 지류들이 흐르다 급류를 만나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지듯 이 모자이크 직조화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광기를 담아낸다.

  등장 인물들은 화가 나 있고, 이성은 마비되어 있으며, 절망과 고통에 몸부림친다. 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이 영화를 인종 청소의 광기에 휩싸인 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함과 연결지어 보는 관점은 일면 타당하다. 원작자 데얀 두코프스키(Dejan Dukovski)는 인터뷰에서 작가의 의무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굴절된 부분을 올바로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출처: critical-stages.org). 잘못된 정치 행태, 예를 들면 파시즘을 태동하게 만드는 집단적 무의식에 대한 감지와 기록이 작가의 본분이라고 그는 말한다. 두코프스키는 '광기'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발칸 내전의 끔찍한 양상들을 개별 인물들의 행동으로 재현한다. 특이한 점은 거기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애지중지하는 폭스바겐이 망가진 것을 본 차주는 가해자 청년의 집을 찾아가 모든 것을 다 깨부순다. 커피 마시며 좀 쉬고 있다 버스를 탈취당한 기사는 필사적으로 버스를 쫓아가 사이코 탈취범에게 죽음의 응징을 가한다. 단속에 걸렸다가 나쁜 경찰에 의해 고자가 되어버린 남자는 경관을 급습해 거의 산송장처럼 만들어 버린다. 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폭력의 발화는 그칠 줄 모르며 불길을 더해간다. 관객은 영화 내내 넘실거리는 분노와 광기를 목도한다.

  "발칸은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폭력이 흘러서 모이는 곳이지. 그래서 과다출혈처럼 전쟁이 터지는 거야."

  카바레 가수는 그렇게 읊는다. 그 피터지는 살육의 현장과 그 근방에 있는 이들은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누군가의 폭력에 망가진 이는 어떤 식으로든 그 상흔을 또 다른 구성원에게 남기는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위협받는 생존에 대한 압박감은 모두를 광기의 레이스로 몰아넣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것을 형상화시켜서 보여준다. 차 휘발유 도둑으로 몰린 남자는 몰려나온 아파트 주민들에 의해 쫓기다 높은 철망을 오른다. 그가 마치 십자가의 예수처럼 양팔을 벌리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가운데, 새어나온 휘발유에 붙은 불로 폭발이 이어진다. '화약고'는 결국 발칸 수난극을 완성하며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 무지막지한 폭력의 서사시는 너무나도 어둡고 끔찍하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보스니아 내전을 치뤘던 유고 국민들의 내적 외상과 죄의식에 대한 심리적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잔혹한 정치 지도자가 감행한 피의 내전, '화약고'는 그것이 드리운 길고 고통스러운 그림자를 여러 등장 인물들의 망가진 삶으로 재현한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이 영화가 건조하게 늘어놓는 폭력과 광기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찾을 수 없다. 고란 파스칼리예비치 감독은 발칸 지역의 특수성과 복잡한 역사로 얽힌 분쟁의 숙명을 '화약고'로 처절하게 그려낸다.


*사진 출처: sr.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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