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소련의 붕괴와 해체 과정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일련의 개혁
개방 정책은 서서히 침몰해가고 있었던 소련을 구하기 위한 응급 처방이었다. 그러나 성급하게 추진된 설익은 정책들은 오히려 소련의
침몰을 가속화시킨다. 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khnazarov) 감독의 1986년작 '메신저 보이(Courier)'는
고르바초프 집권 시기 소련 사회가 겪었던 갈등과 혼란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원작은 감독 자신이 1982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로,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스탈린의 철권 통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해가
1982년, 뒤를 이은 안드로포프 시절에도 소련은 철의 장막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1985년, 마침내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고서야 소련은 장막 바깥의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메신저 보이'는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졌다.
영화는 이혼 법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반은 부모의 이혼 법정 한 구석에 앉아있다.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난 이반의 아버지는 이혼 후
아프리카로 연구를 위해 떠난다. 엄마와 함께 남겨진 이반은 대학에 가지 않고, 출판사의 메신저 보이로 취직한다. 엄마가 자신을
걱정하며 잔소리를 하자, 아빠가 그래서 엄마를 떠난 거라고 독설을 퍼붓고는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신문지를 잔뜩
가져와서 자신의 방에서 불을 붙인다. 골때리는 이반의 기행은 계속 이어진다. 출판사에 적어낸 허황된 이력서에는 자신의 집안을 봉건
시대 귀족으로 소개한다. 그런가 하면, 교수 집에 전달해야할 원고를 3시간이나 늦게 갖다주고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인생의 목표가 뭐냐하면 말이죠, 많은 봉급, 자동차, 크고 멋진 다챠(dacha, 러시아의 시골 별장), 그리고 시내 중심가의 아파트를 갖고 싶군요."
이반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힌 쿠즈네초프 교수는 '자네 꿈이 뭔가'를 묻고는 그런 대답을 듣는다.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살려거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지."
이반에게 교수는 '요즘 애들은 노오력이 부족해'라고 훈계하는 꼰대일 뿐이다. 쿠즈네초프 교수는 지인들을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젊은 애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의 지인은 속썩이는 아들에 대해 성토한다. 영화에서 이러한 세대 갈등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의 축으로 자리한다. 미래에 대한 별다른 희망도 꿈도 없이 표류하는 이반의 모습은 기성 세대에게는 나태한
낙오자로 인식된다.
이런
이반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친구는 바진인데, 바진은 가난한 하층민 계층으로 하는 일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운다.
바진과 그 주변 친구들은 당시 하층민 청소년들의 또래 문화 활동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낮에 공터에서 미국 음악을 틀어놓고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고, 저녁이면 댄스 배틀을 벌인다. 영화에는 다양한 음악들이 사용되는데,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전자 음악을
비롯해 스콜피온스의 노래와 미국의 팝송들까지 흘러나온다. 이는 고르바초프 시대의 서구 문화에 대한 관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반의 똘끼어린 남다른 모습에 쿠즈네초프 교수의 대학생 딸 카챠는 호감을 느낀다. 둘은 곧 친해지지만, 카챠와 이반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이반은 카챠 친구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부유한 계층의 일상을 엿보고는
거리감을 느낀다. 기분이 상한 이반은 그 집에서 값비싼 프랑스 향수를 들이마시는 객기를 부린다. 이러한 장면들은 당시 소련
사회에서 세대 갈등과 함께 기존에 존재하던 계층간의 갈등이 점차적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기성 세대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 그들에게 더이상 사회주의의 이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밀려드는 서구
문화와 자본주의의 파고 속에서 그들은 공산주의 국가의 건실한 노동자를 꿈꾸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이들 자신도 스스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반의 상상과 꿈 속에서 나타나는 아프리카의 사막과 원주민의 모습은 무작정 도피하고 싶은 이반의 현실인식을
보여준다.
"넌 꿈이 뭐냐?"
"코트 하나 갖는 거. 이제 곧 겨울이 오잖아. 작년 겨울에 재킷 하나 가지고 버티다 감기 걸렸거든."
영화의 마지막, 바진과 함께 공터에 앉아있던 이반은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바진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자, 이 코트 입고 이제부터 다른 꿈을 꿔봐."
그렇게 말하는 이반의 눈에 멀리서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 군인이 보인다. 초췌한 군인의 얼굴은 흉터로 일그러져 있다. 이제 막
아프간에서 돌아온 군인의 모습은 이반이 살아갈지도 모르는 또 다른 미래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끝마친다. 가끔 '좋은 영화'의 기준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마다 다른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시대
정신'이 들어있는 영화가 좋은 영화이다. '메신저 보이'는 그런 면에서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고르바초프 시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명암을 감지한다. 영화는 그것이 향후 소련 사회에 미칠 파장까지도 예측하게 만든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자신이 서있는 시대의 정신을 영화라는 매체에 예언자적인 감수성으로 담아냈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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