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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뜨거운 여름을 견디는 이들에게, 여름 생존자(Summer Survivors, 2018)

 

  "이런 데서 이상한 사람들과 있으면 네가 더 나빠질 거야. 좋은 음식 먹고 영양제 같은 것도 먹으면 좀 나아지지 않겠니. 그러니 의사한테 말해서 여길 나가자꾸나."

  남자는 정신 병동에 입원해 있는 딸을 그렇게 구슬린다. 딸 건너편 침대에서 이어폰을 꼽고 대화를 못들은 척하는 유스테를 남자는 힐끗 쳐다본다. 그의 눈에는 유스테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딸이 그곳을 나가서 좋은 음식이나 영양제 먹는다고 나아질 수 있을까? 리투아니아의 신예 감독 마리야 카브타라제(Marija Kavtaradzė)의 2018년작 '여름 생존자(Išgyventi vasarą)'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심리학과 대학원생인 인드레는 바이오피드백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한다. 인드레가 도움을 받길 원하는 빌뉴스 정신 병동의 의사는 조건을 하나 내건다. 다른 정신과 클리닉으로 치료를 의뢰할 병동의 환자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를 데려다 주고 오라는 것. 꽤 먼거리를 환자들을 데리고 운전해야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만 인드레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나마 오랜 경력의 간호사가 동행하는 것에 안심하면서 길을 떠나는 인드레. 파울리우스는 조울증 환자이고, 유스테는 최근에 자살 시도를 했다. 타인과의 소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대학원생은 환자들과 함께 하는 이 여정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여름 생존자라... 제목이 특이하다. 마리야 카브타라제 감독은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은 매일매일의 삶이 투쟁이며, 그것에서 생존하는 것이 커다란 화두이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출처: cineuropa.org와의 인터뷰). 영화의 구성은 비교적 명료하다. 과제가 주어지고, 주인공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이 로드 무비에서 그가 함께 할 동행자들은 평범한 이들이 아니다. 감독 마리야 카브타라제는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들에게 찍힌 사회적 낙인이 얼마나 견고하고 견디기 힘든 것인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인드레가 운전하는 차에는 '빌뉴스 정신 병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파울리우스는 휴게소에서 젊은 커플이 그것을 보고 하는 소리를 듣는다. 저 차에 탄 미친 인간들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며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은 그는 임시방편으로 차에 박스를 뜯어붙여 글씨를 가린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인드레와 파울리우스, 유스테는 서로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조금씩 친해진다. 인드레는 5년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는 파울리우스의 절망도 공감하고,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시도를 했던 유스테의 아픔도 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를 특이하고 이상한 모습이 아닌, 그 나이 또래 젊은이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물론 그것은 매일 먹어야 하는 정신과 약물과 치료의 도움으로 위태위태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생존자(survivor)라는 제목 그대로, 파울리우스와 유스테는 매 순간 마음 속 고통과 전쟁을 치룬다.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져서 두려움에 떠는 유스테를 돕는 것은 파울리우스이다. 그는 유스테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다 지나가, 너도 알잖아. 지나갈 거라구'라고 말해준다.

  인드레는 아무는 팔목 상처를 가려워하는 유스테를 위해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서 소독을 해준다. 붕대를 풀자 길게 꿰맨 유스테의 자해 상처가 보인다. 그것은 타인이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유스테의 내적 고통의 흔적이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파울리우스도 마찬가지. 휴게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파울리우스. '난 다시 노래할 거야(I'll sing again)'라고 목놓아 부르는 파울리우스의 바람은 언젠가 돌아가고픈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간절한 외침처럼 들린다.

  리투아니아의 이 신예 감독은 훈계나 설교가 아닌 따뜻한 감성으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과 맞선다. 여행 도중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사물들은 등장인물들의 내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자신의 영화가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들과 그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카브타라제 감독.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이 가진 견고한 편견의 벽이 조금은 낮아졌음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다시 빌뉴스 병동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유스테는 침대에 누워 웃는 연습을 한다. 억지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 연습이 자신의 오늘을, 내일을 견딜 수 있게, 그리고 살아갈 수 있게 할 거라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리투아니아어 원제목의 뜻은 '여름을 견디다'이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 꽂히는 여름날을 견뎌내는 것처럼,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이들에게 '여름의 생존자'는 작은 위로를 건넨다.  


   

*사진 출처: filmproducers.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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