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소련 영화 속 확장된 상상의 영토로서의 사막, 사막의 하얀 태양(Белое солнце пустыни, The White Sun of the Desert1970)


  이 영화의 대본은 3년 동안 소련 영화계를 떠돌아 다녔다.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연출을 제안받은 감독들마다 손사래를 쳤다. 그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미르 모틸(Vladimir Motyl) 감독에게 시나리오가 떨어졌다. 이래저래 잘 풀리지 않았던 이 감독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모틸 감독은 연출료로 받게 될 돈이 절실했다. 영화는 촬영 시작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소품으로 대여한 물품들이 도난당하는가 하면, 내정된 주연 배우가 술 문제로 골치를 썩이는 바람에 교체해야만 했다. 뜻대로 나오지 않는 장면들 때문에 재촬영을 거듭하다 보니 예산이 초과되었고, 급기야 모틸 감독은 해고 통보를 받기도 했다. 어렵게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 그는 영화를 겨우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Goskino)의 반응이 영 신통치가 않았다. 영화의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개봉하기 어렵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모틸 감독이 나중에 행운,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서부 영화의 광팬이었다. 그는 이 영화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막의 하얀 태양'은 소련 관객들과 만나게 되었다.

  미국 영화에 서부극(Western)이 있다면, 소련에는 Red Western인 Eastern이 있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소련은 촬영장소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북부 시베리아부터 중앙 아시아의 사막과 초원에 이르기까지 어떤 배경의 시나리오든 소화해낼 여력이 있었다. 다게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은 사막 지형을 품고 있어서 총잡이 활극을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영화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1960년대, 이국적인 배경의 영화들이 높은 흥행 실적을 기록하자 비슷한 영화들이 연달아 제작된다. 코미디 영화의 대가였던 레오니드 가이다이(Leonid Gaidai) 감독의 1967년작 '카프카스 납치(Kidnapping, Caucasian Style)'는 북 카프카스 지역을 배경으로 '신부 납치'라는 지역적 소재로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는 1967년 개봉작 가운데 최대 흥행 실적을 올렸다. 그 시기에 나온 소련 영화들은 내부적으로 개척해나간 상상의 영토들을 보여준다. 역시 가이다이 감독의 작품인 '이반 바실리예비치 씨, 직업을 바꾸다(Ivan Vasilievich: Back to the Future, 1973)'는 타임 슬립을 소재로 이반 뇌제가 다스리던 16세기와 현실을 오간다(제작사 Mosfilm에서는 한글 자막을 지원하는데, 자막의 수준은 상당히 실망스럽다).

  '사막의 하얀 태양'의 배경도 확장된 상상의 영토였다. 1920년대 카스피해 동부 해안, 적백 내전의 끝자락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적군(赤軍) 병사 수코프는 사막의 모래에 파묻힌 사이드를 구해준다. 지역 산적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재산을 빼앗긴 그는 절망한 상태. 살려준 수코프에게 왜 살렸냐며 원망하기도 하지만, 마음으로는 고마움을 느낀다. 사이드와 작별한 수코프는 적군 지휘관과 조우하고, 지휘관은 지역 갱단 두목 압둘라의 여러 부인들을 보호하라는 임무를 떠맡긴다. 적군에 의해 쫓기는 압둘라는 무슬림의 법에 따라 함께 데려가지 못하는 부인들을 다 죽일 계획이었다. 그가 돌아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여자들을 수코프는 마지못해 호위한다. 그런데 탈출에 성공한 압둘라는 부하들과 함께 수코프를 추격한다. 과연 수코프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소련의 Eastern을 헐리우드 웨스턴과 비교하는 일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전반적으로 제작 품질의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도 보고 있노라면, 왜 국가 영화 위원회에서 개봉을 주저했는지 알게 된다. 오늘날의 관객들은 그다지 개연성 없는 줄거리와 늘어지는 내러티브, 허술하기 짝이 없는 총격전에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해 개봉된 소련 영화들 가운데 관객 동원 5위를 기록했고,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더해갔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러시아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유머 감각과 정서가 있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단번에 인기곡으로 등극했다. 소련 영화에서 노래는 무척 중요하다. 이 나라 국민들의 노래(러시아 로망스) 사랑은 정말이지 지극해서, 뭔 영화마다 노래들이 뮤지컬처럼 흘러나온다.

  초기 단계의 시나리오에서 무슬림 압둘라와 그의 여러 아내들의 이야기는 검열 당국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 결과 적군 병사 수코프의 활약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압둘라의 아내들에게 해방을 선언하는 수코프, 그런 그에게는 적군으로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에서 특이한 점이 엿보이는데, 중간 중간 수코프가 고향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내레이션으로 들어간다. 수코프는 수구적 잔재가 존재하는 그 땅에 혁명이 가져올 자유를 꿈꾼다고 내레이션을 통해 관객들에게 말한다. 헐리우드 웨스턴이 돈과 욕망, 복수와 정의에 대해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소련의 이 사막 활극은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을 부르짖는다. 결국 소련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법칙,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대원칙에서 '사막의 하얀 태양'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압둘라와 그 잔당들은 소탕의 대상이며, 압둘라의 아내들에게는 자유가 선물처럼 주어진다. 물론 수코프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없다. 사이드를 비롯해 마을 주민, 무기를 소유한 전직 세관 직원 파벨이 그를 돕는다. 중립적 위치에 있었던 파벨이 수코프의 편에 서는 계기가 흥미로운데, 그는 수코프의 어린 부하 페트루카의 죽음을 보고 마음을 돌린다. 2년 전에 죽은 아들로 상심한 파벨은 페트루카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런 페트루카를 압둘라가 죽이자 파벨은 복수를 결심한다. 파벨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이런 인간적인 모습 또한 소련 관객들에게 정서적인 호소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시대와 이국적 공간 속 이야기에서도 가족이라는 근원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이 가진 영향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수코프가 압둘라의 아내들을 적군 지휘관에게 인계하고 고향땅을 향해 가는 것으로 끝맺는다. 수코프가 나중에 아내를 만났는지, 아니면 어떤 불운에 의해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이 열린 결말은 한편으로는 기나긴 혁명의 여정에 놓여있던 소련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적군 병사 수코프가 꿈꾸던 혁명의 이상은 오랜 역사적 실험 끝에 좌절되었다. 소련 영화의 확장된 영화적 영토인 '사막'은 그렇게 모험과 방랑, 표류의 공간으로 남았다.    

 


*사진 출처: eg.ru   수코프 역의 아나톨리 쿠즈네초프(
Anatoly Kuznetsov)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