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농담'. 내 기억 속의 그 소설은 이렇게 각인되어 있다. '마음에 둔 여자한테 보낸 엽서에 가벼운 농담 좀
적었다가 인생을 탈탈 털려버린 남자의 이야기'. 야로밀 이레스(Jaromil Jireš) 감독의 1969년작 '농담(The
Joke)'는 밀란 쿤데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이레스 감독과 함께 각색 작업에 참여했다. 과연
원작자가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의 시도는 성공적이었을까? 물론 쿤데라는 소설 속의 내용을 그대로 다 화면으로 보여줄 수 없었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 일부는 생략되었고, 캐릭터들의 묘사는 피상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소설을 읽은 관객들이라면 당연히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농담'은 매우 불친절한 영화가 될 수 있다.
루드빅은 15년 만에 자신의 고향에 돌아온다. 그에게는 꼭 해야할 복수가 있다. 루드빅은 자신을 반동 분자로 몰아 무려 6년의
세월을 군대와 탄광에서 보내게 만든 사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대학 시절, 루드빅은 마음에 둔 마르케타에게 엽서를 보냈었다.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했던 마르케타는 루드빅의 엽서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생각한다. 당으로 넘어간 엽서는 루드빅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몰아넣는다. 인민 재판을 통해 대학과 당에서 제명당한 그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마르케타를 비롯해 인민재판을 주도한
친구 파벨에 대한 증오심이 루드빅을 사로잡는다. 루드빅은 우연한 기회에 파벨의 아내 헬레나를 알게 되고, 헬레나를 유혹해서 자신의
복수극을 완성하려고 하는데...
소설은 4명의 등장 인물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는 루드빅의 시점만을
보여준다. 선택과 집중,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기도 하다. 야로밀 이레스 감독은 루드빅이 고향에
도착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루드빅의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교차편집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루드빅은 우연히 시청 청사에 갔다가 행사를 참관하게 된다. 도시에 새로 전입한 주민들을 환대하는 그
행사는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꽤 격식있게 치뤄진다. 그러나 루드빅은 시장이 연설하는 것을 보며 군대의 가혹했던 지휘관을 떠올린다.
친했던 고향 친구 야로슬라브를 만나서도 그의 과거는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야로슬라브는 체코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을
운영한다. 악단의 연습과정을 지켜보던 루드빅은 군대에서의 끔찍했던 시련과 그곳에서 부르던 군가(이제는 노예도 없고 주인도 없다)를
기억해 낸다.
이렇게 교차편집된 장면들을 통해 관객은 루드빅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엽서 때문에 회부된 인민
재판일 것이다. 루드빅의 대학 친구와 동료들은 루드빅을 대학과 당에서 제명하는 데에 찬성한다. 거수로 결정되는 그 과정은
루드빅에게 견디기 힘든 모멸감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그러한 인민 재판은 체코의 공산 정권 수립 과정에서 소련의 스탈린 주의가 끼친
폐해였다. 정적의 축출과 숙청 과정에서 그것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온전히 정치 비판적인 텍스트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교조주의적인 사상과 이념이 개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에 더 촛점을 맞추고 있다. 쿤데라는 거대 담론이
아닌 개인의 내면을 파고든다. 루드빅이 파벨에게 하려는 복수극의 실체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루드빅은 파벨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이나 파멸 대신에 파벨의 아내를 유혹해서 굴복시킴으로써 파벨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입증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벨 부부가 별거 중이라는 사실은 루드빅의 복수극을 허망하게 만든다. 거기에 루드빅에게 버림받은 헬레나가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자살 소동이 덧붙여지는데, 이쯤 되면 과연 '농담'이 신랄한 체제 비판적 텍스트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럼에도 체코의 공산당 정부는 이 영화를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폭압으로 끝나면서, 1960년대 체코
영화계에 불었던 뉴 웨이브(New Wave)의 훈풍은 칼바람으로 변한다. 영화 '농담'은 1971년부터 1990년까지 상영 금지
목록에 올랐고, 밀란 쿤데라는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영화 '농담'은 원작 소설이 지닌 의미를 재현해내는 데에는 상당히 힘이 달린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체코 공산 정권 수립에서부터
프라하의 봄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이지러진 역사적 단면을 개관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소련의 스탈린 주의가 체코
현대사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여러 체코 영화들에서 감지된다. 오타카르 바브라(Otakar Vávra) 감독의
'Witchhammer(1970)'는 1950년대 인민 재판을 마녀 사냥에 빗대었고,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다비드
온드리첵(David Ondříček) 감독의 'In the Shadow(2012)' 또한 초창기 체코 공산 정권과 소련의 유착을
범죄 스릴러 장르에 담았다. 외국의 관객들은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체코의 과거와 만나게 된다. 영화 '농담'은 그러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꼭 거쳐가야할 작품으로 남았다.
*루드빅이 엽서에 썼던 '농담'은 이러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야.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기지. 트로츠키 만세!"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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