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깊이 있는 창작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성장의 여정, Passage(2020)

 

  Bolex 16mm. 1학년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주로 썼던 카메라 기종이다. 지금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은 아마도 디지털 기기로 공부하고 작업할 것이다. 내가 배울 당시에 영화에서 디지털이란 저예산, 실험 영화에서나 시도되는 것이었다. 디지털이 필름을 막 밀어내는 시기였다. Bolex로 찍은 16mm 필름을 현상해 보면, 거칠고 누런 색감이 났다. 마치 굵은 모래 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16mm=학생용=단편=실험 영화, 이런 공식이 적용되곤 했다. 그렇다고 이 카메라가 구닥다리에 우습게 볼 기종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영국의 Mark Jenkin은 'Bait'란 장편 극영화(1시간 29분)를 그 Bolex로 찍었다(조만간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한다). 2019년작이다. 영화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것은 장비가 아니다. 작가적인 관점에서의 성실한 관찰과 깊이있는 사유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의 다큐멘터리 제작 경향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LGBT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다. 'No Ordinary Man(2020)'은 남장 여자의 삶을 살았던 재즈 뮤지션 Billy Tipton의 삶을, 'The Sound of Identity(2020)'는 트랜스젠더 바리톤 가수 Lucia Lucas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다큐 모두 소재에 있어서 파격성이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소재가 주는 반향을 뛰어넘어 그것을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으로 얼마나 잘 변주해 내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두 작품 모두 매우 실망스러웠다.

  'No Ordinary Man'은 지금의 시대를 사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이 나와서 빌리 팁튼과 자신의 삶을 견주어 이야기한다. 성적 다양성에 닫혀있던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과한 팁튼의 삶은 대충 훑어보고 만다. 일종의 메타적 방식(meta documentary)을 적용한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난삽하고 경박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The Sound of Identity'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바리톤 가수 루시아 루카스의 Tulsa Opera단 데뷔 공연 준비과정을 따라간다. 최초의 트랜스젠더 오페라 가수라는 점에만 집중한 나머지 흥미 위주의 가벼운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두 다큐는 중심 소재가 되는 인물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젊은 여성 감독 Sarah Baril Gaudet의 2020년작 다큐 'Passage(2020)'는 앞서 언급한 두 다큐에 비한다면 분명한 자기 색깔과 나름의 성찰을 담고 있다. 다큐의 주인공은 시골 마을의 두 친구이다. 캐나다 퀘벡주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Temiscamingue은 감독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과 나즈막한 산들로 둘러싸인 그곳은 전형적인 시골이다.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18살의 Yoan과 Gabrielle는 친한 이성 친구이다. 동성애자인 Yoan은 단조로운 시골에서 벗어나 대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험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생각 중이다. 동물을 좋아하는 Gabrielle은 말 사육장에서 일하면서, 동물 관리와 치료에 대한 공부를 해볼까 생각한다. 그러러면 집을 떠나 100km 떨어진 낯선 도시의 대학에 가야한다.

  'Passage'는 그 두 친구의 일상을 담담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그들의 고향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다큐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그 Temiscamingue의 자연이 차지한다. 넓게 펼쳐진 녹색의 평원,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 한가롭게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 그렇지만 그곳의 풍광과는 달리 가브리엘과 요안의 마음은 진로와 앞날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물결이 일렁인다.

  동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요안은 도시에서의 삶을 위해 준비 중이다. 게이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는다. 거주할 곳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어떤 일자리를 얻을지도 고민한다. 요안의 조부모는 낯선 도시로 떠나게 될 손주가 걱정스럽지만, 기꺼이 응원한다. 가브리엘은 직업을 위해 진로를 결정했지만, 부모와 남자친구가 있는 고향땅을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가브리엘과 요안은 그러한 고민들을 진솔하게 나누면서 마음의 짐을 덜어낸다. 가브리엘이 자신보다 8살이나 많은 남자친구에게 느끼는 세대차와 둘 사이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을 때, 요안이 해주는 말들은 전문 상담가 못지않다. 남자친구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하는 속깊은 친구 요안. 가브리엘과 요안이 그렇게 의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친구'라는 단어의 온기를 느낀다.

  '통과'라는 의미의 제목답게 다큐는 요안과 가브리엘이 어른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그들의 마을을 지나는 길고 한적한 도로변의 풍경도 자주 나온다. 진로, 성정체성, 연애, 가족과의 관계, 그 모든 것이 두 친구가 나아가는 길 위에 놓여있다. 어찌보면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는 걱정들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의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품고 감싸안는다. 그것은 도시에서 사는 그 또래 청년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특권인지도 모른다. Sarah Gaudet 감독 자신에게도 Temiscamingue의 자연이 준 평화로움과 사유의 지평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Passage'에는 감독의 고향땅과 그곳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다큐는 요안과 가브리엘이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은 이제 막 인생의 작은 길목을 통과했다. 감독 자신에게도 의미있는 첫 장편이 된 'Passage'는 젊은 다큐 제작자로서 앞으로 내놓을 작품들에 대한 희망의 빛을 던진다. 이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다큐는 영상물 창작자가 갖추어야할 덕목이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대상을 관찰할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것. 좋은 작품이란 이 간명한 원칙이 구현된 결과물이다. 그것을 제대로 해내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영화'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기도 하다.  



*사진 출처: f3m.ca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