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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S 8부작 미니 시리즈 'Ken Burns: The West(1996)' 4편

피비린내와 포연(砲煙) 속에서;

4편 Death Runs Riot (1856–1868), 1시간 24분


  다큐 'The West'의 특징은 미시사(微視史)적인 관점을 취했다는 점이다. 지난 3편에서 골드 러시에 동참한 농부 윌리엄 스웨인의 편지글을 주요한 얼개로 삼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4편에서는 1850년대에 캔자스에 살았던 찰스 러브조이(Charles Lovejoy)목사의 부인 줄리아의 편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노예제를 둘러싼 미국 내의 극심한 갈등은 마침내 내전으로 이어진다. 러브조이 부인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시기의 혼란과 고통을 증언한다. 개인의 서간, 일기와 같은 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조망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관객들에게 생생한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노예제'는 미국의 오랜 근심거리였다.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의 근원이 '종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에는 당시에 4백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어떻게 기독교가 국가적 이념이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 노예제가 존립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에 반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노예 폐지론자(abolitionist)들이었다. 찰스 러브조이 목사도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1855년, 러브조이 목사는 가족과 함께 캔자스로 이주한다. 그가 원한 것은 금이나 땅, 모험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 땅에 자유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캔자스는 노예제의 격전지였다. 1854년에서 1859년에 이르는 시기에 찬성론자와 폐지론자들이 맞붙어 싸움을 벌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것을 'Bleeding Kansas'로 불렀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왜 캔자스는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의 진앙지가 되었을까? 북부는 이제 노예제를 더이상 지지하지 않았으나, 남부의 입장은 달랐다. 남부인들에게 노예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 재산을 강제로 빼앗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회는 찬반 양론으로 팽팽하게 나뉘었다. 새로운 준주 캔자스와 네브래스카는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그곳 주민들의 뜻에 따라 자유주(노예 폐지주) 합류를 결정하는 것으로 의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캔자스에서는 찬성론자와 폐지론자들의 세불리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선거 부정에 이어 캔자스에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했다. 인접한 노예제 찬성주 미주리주의 'Border Luffian'이라고 불리는 싸움꾼들이 캔자스로 몰려와서 난동을 피웠다. 방화, 약탈, 살인이 난무했다. 1856년에 양측이 맞붙은 싸움은 전쟁과 같았다. 무려 2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폐지론자의 선봉은 '존 브라운(John Brown)'이었다. 그는 극렬한 무력 투쟁으로 맞섰다. 1859년, 노예 반란을 일으킨 브라운의 처형과 함께 이 피의 전투는 끝난다. 캔자스는 자유주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캔자스에서 일어난 일들은 남북 전쟁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몰몬교도의 집산지 유타의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일부다처제(Polygamy) 교리가 문제였다. 브리검 영은 무려 27명의 아내를 두었다. 의회에서는 몰몬교의 그런 교리를 맹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몰몬교도들은 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1857년, 마침내 뷰캐넌 대통령이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유타주에 2500명의 연방군을 파병한다. 솔트 레이크 시티는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벌어진 일이 '메도우산 대학살(Mountain Meadows massacre)'이었다. 서부로 향하는 이주민 무리를 습격해 잔혹하게 죽인 이들은 몰몬교도들이었다. 120명의 여행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죽임을 당했다.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인디언의 소행이라고 발뺌을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장 브리검 영이 공격을 지시했다.

  왜 몰몬교도들은 그런 학살극을 벌였을까? 아직도 그 이유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방군의 진입과 관련한 몰몬교 내부의 극심한 긴장과 불안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파국을 만들었다. 이른바 '몰몬 전쟁(Mormon War)'이라고 불리는 이 일련의 상황은 1859년, 유타주가 정식주로 승격되고 몰몬교도들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으로 봉합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1860년,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노예제 폐지 공약에 반발해 이듬해 남부가 연방을 탈퇴한다. 그리고 내전, 미국인들이 'Civil War'라고 부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캔자스에서는 이제 진짜 전쟁이 벌어진다. 러브조이 부인이 편지에 쓴 캔자스와 미주리의 싸움은 지독한 살상극이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짐 레인의 근거지에 미주리의 게릴라 콴트릴(William Quantrill)은 무지막지한 복수를 선사한다. 183명이 사망했고 185채의 집이 불탔다. 남은 것은 80명의 과부와 250명의 고아였다.

   남북 전쟁의 불길 속에서 인디언들 또한 고통을 받았다. 감리교 목사 출신의 쉬빙턴(John Chivington)은 '미친 설교자(Crazy Preacher)'로 불렸다. 그는 목사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군대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그는 정치적 야심에 불탔다. 북부군에 들어가서 전공을 쌓는 데에 몰두한 그에게 인디언들은 출세를 위한 제물로 보였다. 그에 의해 이루어진 '샌드 크리크 대학살(Sand Creek Massacre, 1864)'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참한 살육극이었다.

  미 정부와 평화 조약을 맺길 원했던 남부 샤이엔 부족들은 배신당했다. 쉬빙턴의 군대는 여자와 아이, 임산부까지 잔혹하게 죽였다. 난자당한 시신은 군인들의 자랑거리로 능욕을 당했다. 의회는 미군의 명예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범죄라며 조사를 지시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을 설명하는 인디언 작가는 샌드 크리크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담을 들려준다. 자신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새벽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동행한 이들도 같은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샤이엔 원주민들의 억울한 죽음은 그렇게 그 땅에 묻혔다. 

  1865년, 전쟁이 끝났다. 이제 군대는 해산되었고, 군인들은 집과 땅을 찾아 서부로 몰려든다. 이주민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땅들은 인디언들의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수, 아라파호, 샤이엔 인디언들이 연합했으나 셔먼의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1868년에서 1869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남부 평원의 인디언들이 그렇게 쓸려나갔다.

  러브조이 목사 부인은 캔자스를 떠나며 마지막 편지글을 남긴다. 캔자스에 온 뒤로 온갖 고통과 공포, 두려움 속에 지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피 튀기는 유혈극은 끝나고,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몰몬 전쟁을 치룬 몰몬교도들은 미 연방의 진정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길목에 서있었다. 남북 전쟁과 함께 수행된 인디언 말살극은 남부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피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그러나 전쟁의 포연(砲煙)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광대한 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철도 건설의 꿈이었다.

  'The West'의 4편을 보는 일은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샌드 크리크 대학살에 대한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다큐의 자료 화면과 내레이션만으로는 매우 한정적인 역사적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생략된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이야기를 맞추어 가면서 그 무지막지한 피의 시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서부'라는 공간의 도전과 모험은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나 다름없는 국가적 범죄와 엮여 있었다. 그 어두운 그림자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가난과 질병, 약물중독의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그 고통스러운 유산에 대한 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pb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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