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의 아름다운 유작, Ashik Kerib
어린 시절부터 그는 병약했다. 부유한 귀족이었던 할머니는 그런 손주의 건강을 위해 코카서스 지방에 보내어 요양을 하게 했다.
9살 소년의 마음은 광대하게 펼쳐진 코카서스의 자연 풍광에 매혹되었다. 그는 이후로도 여러 번 코카서스에 머물며 그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렇게 코카서스는 그의 영혼의 일부분이 되었다. 문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틈틈이 시와 소설을 썼다.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는 군대에 들어가서 방탕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좋은 성격의 사람은 아니었다. 도무지 예측하기 어려운 불같은
성미에 제멋대로였다. 동료를 짖궃게 놀려대다가 결투 신청을 받았다. 자신의 고르지 못한 성미로 인한 댓가는 죽음이었다. 그 때의
나이가 스물 여섯, 생전에 많은 시와 소설을 썼으나 출판된 시집은 단 한 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러시아 문학사에 빛나는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시인 미하일 레몬토프(Mikhail Lermontov, 1814-1841)의 이야기이다.
조지아(Georgia) 태생의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는 레몬토프가 쓴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Ashik Kerib(1988)'은 파라자노프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작업 중이던 영화를 미처 끝내지 못하고
1990년에 세상을 떴다. 파라자노프는 소련 영화계의 이단아였다. 자신만의 영화 미학으로 영화사에 분명한 각인을 남겼지만, 그
생애는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소련 정부는 당국의 예술 창작 원리에 따르지 않는 파라자노프를 철저히 탄압했다. 동성애를 비롯해
여러 범죄 혐의를 뒤집어 씌우며 감옥과 수용소행을 강제했다.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 1964)', '석류의 빛깔(The Color of Pomegranates, 1969)'은 그런 악전고투
속에서 남긴 작품이다.
'아쉬크 케립'은 그 두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탐구해온 파라자노프답게 이 영화도 민속지학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간명하다. 가난한 음유시인 아쉬크 케립은
어여쁜 아가씨 마굴과 사랑에 빠진다. 그는 마굴과 결혼하고 싶어하지만, 마굴의 아버지는 가진 것 없는 케립을 박대하며 내쫓는다.
결혼 지참금을 모으기 위해 길을 떠난 케립은 모험과 역경을 겪은 후, 결국 연인에게 돌아온다.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 파라자노프는 친절하게 주요한 장면마다 제목과 짧은 설명을 넣는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내내 귓가에 휘몰아치는
민속음악은 도무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파라자노프의 위트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민속음악과 함께 깔리는 배경
음악은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이다.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en la mineur)'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가 민속악기로 연주된다. 케립이
파샤(pasha)의 성에 머무를 때, 파샤는 케립에게 자신을 위해 노래하라고 위압적으로 명령한다. 파샤의 옆에 있던 여인들은
기관총을 들어 보이며 환호한다. 클래식 음악과 현대의 무기는 파라자노프의 하이브리드적 민족지 감성에 그렇게 녹아든다.
그의 전매 특허라 할 수 있는 풍부한 상징적 이미지들은 '아쉬크 케립'에서도 반복된다. 흰색의 비둘기, 붉은색의 석류와 고추,
다양한 원색으로 구성된 민속의상, 춤과 노래... 파라자노프의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시원성(始原性)'을 떠올리게 만든다.
매혹적인 이미지와 소리의 향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초창기 무성영화도 그렇게 무수한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그 단순함과 아름다움을 파라자노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이것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누군가 내 영화에서 길을 찾으려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길을 잃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을 보다 많은 이들이 알게 되길 바란다. 어떤 관객에게 '아쉬크 케립'은 별 재미도 없고, 중앙아시아의
민속 전설을 어설프게 담아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대부분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이 영화의 모든 것은 '프로페셔널함'이나 '좋은 때깔'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에게 '아쉬크 케립'은 좋은 영화이다. 파라자노프가 영화를 만들고 바라보는 방식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에는 흰색의 비둘기가 카메라 위에 앉아있다. 그리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추모하며'라는 글씨가 보인다.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동기였던 타르코프스키는 파라자노프의 절친이었다. 두 사람의 영화적 영혼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었던 '지음(知音)'의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식까지, 나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2. 예술 영화와 Netflix의 상업적 감수성이 만났을 때, The Power of the Dog
'천원샵'과 같은 잡화점의 장점은 무엇일까? 자잘구레한 물건들을 여러 다른 상점에 들리지 않고 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Netflix도 보다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잡화점의 마케팅 전략을 채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자체 제작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큐 관객들을 불러 모은 데 이어, 넷플릭스는 온라인 매대에 예술 영화도 꾸준히 올려놓고
있다. 예술 영화를 찾는 영화팬들에게 '우리도 이런 거 만들 줄 알아요!'하고 외치는 것일까? 제인 캠피온은 그 넷플릭스와 손잡고
신작 영화를 내놓았다. 'The Power of the Dog', 우리말로 번역하면 '개의 힘'이 되겠다. 도대체 제목 '개의
힘'에는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영화의 원작은 미국 작가 토마스 새비지(Thomas Savage)가 1967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다. 이안 감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 2005)'의 원작 소설을 쓴
E. Annie Proulx는 자신의 소설이 새비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비지의 소설은 제인 캠피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캠피온은 영화 'In the Cut(2003)'의 폭망으로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TV 미니 시리즈로 작업을
이어오던 캠피온에게 그런 면에서 'The Power of the Dog'은 재기작인 셈이다.
이런 신작 영화를
리뷰할 때의 어려움은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다 보니 대충 줄거리
소개하고, 정작 중요한 부분에 대한 언급은 피해서 변죽만 울리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The Power of the
Dog'의 경우도 그렇다. 1925년, 몬태나의 목장주 필은 동생 조지와 거칠고 외로운 서부의 삶을 살고 있다.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형과 달리 자상한 조지는 여관집 주인인 과부 로즈와 결혼한다. 필은 로즈가 아들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조지의 재산을 보고
결혼했다고 생각한다. 로즈는 필의 무시와 조롱 속에서 알콜 중독에 빠져든다. 의대에 다니는 로즈의 아들 피터가 방학을 맞아 집에
들어오면서 이 어울리지 않는 가족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우는데...
솔직히 2시간 6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길고 지루하다. 이 영화는 해외의 영화 잡지들이 뽑은 2021년 최고의 영화 목록에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과연 이
영화가 그런 평가를 받을만 한가? 나에게는 이 영화를 둘러싼 반응의 모든 것들이 과하게 느껴진다. 기존 웨스턴의 내러티브를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하는 수정주의 웨스턴이라는 시각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만들어지는 웨스턴 가운데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얼마나 되는가? 이미 이안 감독이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동성애자 카우보이들의 사랑을 담아냄으로써 웨스턴의
새로운 젠더 서사를 보여주었다. 'The Power of the Dog'은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되는 흐릿한 뒷이야기 같다. 작가
토마스 새비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소설은 서부극의 외피를 둘렀을 뿐, 동성애와 얼킨 가족 서사가 펼쳐지는 드라마이다.
몬태나의 부유한 목장주 필의 지독한 마초적 면모에 숨겨진 동성애 성향은 로즈의 아들 피터의 등장으로 분명해진다. 피터는 필의
비밀을 알아채고, 그것을 자신의 어머니 로즈에게 가하는 필의 학대에 대한 앙갚음으로 돌려줄 생각을 한다. 신중하고 냉혹한, 잠재적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보이는 피터의 행동들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터는 마침내 자신이 해야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필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온 엄마와 계부가 다정하게 끌어안는 것을 보면서 피터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피터는 성경책을 펼치고 시편 22편 20절을 읽는다.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출처 공동번역 성서, Deliver my soul from the sword; my
darling from the power of the dog).'
아니, 그래서 대체 '개의 힘(the
power of the dog)'이 뭐냐고요... 어떤 영화들은 꽤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상징과 수수께끼 같은 장치들을 여기저기
흩뿌려놓고, 관객들과 심리적 시합을 하기도 한다. 지금 시대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나서 그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곱씹고, 그것이
주는 잔향(殘響)과 파문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을 켜고 구글 검색으로 달려간다. 마치 가축 발골 작업을 보는 것처럼
조각조각 분해되어 알기 쉽게 전시된 텍스트의 살점과 뼈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렇게 이해되어야만 하는 영화 텍스트는 과연 좋은
영화일까? 제인 캠피온의 'The Power of the Dog'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게
새롭고 내실있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뉴질랜드의 멋진 풍광과 뛰어난 촬영, 견고한 세트, 관객의 심리를 압박하는 놀라운
음악, 배우들의 좋은 연기... 그 모든 것의 때깔은 정말로 괜찮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러니까, '개의
힘'이란 모든 종류의 충동들,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충동들 말입니다. 결코 통제되지 않는 그 충동은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마침내 파괴시켜버리지요(The power of the dog is all those urges, all those
deep, uncontrollable urges that can come and destroy us, you know?)"
제인 캠피온은 'indiewire.com'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폐쇄적인 장소에서 오랫동안 살게 된 사람들이 겪는
불안과 고통, 일그러진 내면의 충동들, 그것이 가져오는 파국을 'The Power of the Dog'은 한 편의 건조한
수채화처럼 펼쳐서 보여준다. 캠피온의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세련된 웨스턴 서사는 Netflix의 상업적 감수성에 그렇게
희석된다.
*사진 출처: film-grab.com
**사진 출처: thewr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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