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폐쇄적 공간성에 구현된 시대와 정치, The Tall Target(1951)

 

  추리 소설 팬들에게 기차를 배경으로 하는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4년작 영화도 있다. 크리스티는 또 다른 작품 '패딩턴발 4시 50분(1957)'에서도 '기차'의 공간성을 치밀하게 이용한다.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 마츠모토 세이초도 '점과 선(1957)'에서 기차를 전면에 내세워 사건을 전개시킨다.

  1950년대에 제작한 일련의 서부극으로 유명한 앤소니 만(Anthony Mann) 감독이 1951년에 'The Tall Target'을 내놓았을 때, 관객들은 물론이고 평론가들도 낯설게 느꼈던 모양이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앤소니 만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그다지 주목받는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61년의 어느 기차를 배경으로 하는 이 흥미진진한 영화는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1861년 2월, 뉴욕 경찰 존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링컨에 대한 암살 첩보를 입수한다. 그는 링컨이 볼티모어에서 워싱턴 D.C.로 이동할 때 타게 될 기차가 암살범들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러나 케네디의 보고는 묵살되고, 분개한 그는 혼자서 암살 시도를 저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기차에서 자신의 동료와 만나기로 한 케네디는 차디찬 주검이 되어버린 형사를 발견한다. 분명히 기차 안에서는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많은 승객들 가운데 암살범을 찾아낼 것인가? 케네디는 과연 링컨을 구할 수 있을까...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링컨은 늘 암살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 'The Tall Target'은 링컨을 둘러싼 그런 음모들 가운데 한 가지를 주요한 플롯으로 취한다. 선거 운동을 위해 이동하는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형사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만 싸워야 한다. '기차'는 형사 케네디의 외로운 전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암살범은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으며, 그곳에는 너무나 다양한 이들이 있다. 민병대 장교, 작가, 남군에 입대 예정인 웨스트포인트 졸업 생도와 여동생, 그들의 흑인 노예 소녀, 장난꾸러기 꼬마와 엄마... 기차 안은 마치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당시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은 승객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작가 알솝 부인은 남부 출신의 보퍼트 남매와 대척점에 서있다. 알솝 부인이 남매가 데리고 있는 노예 소녀 레이첼에게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지니 보퍼트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니는 레이첼이 자신과 같이 자유로우며, 그것이 레이첼에게 따로 자유를 줄 필요가 없는 이유라고 강변한다.

  "자유는 아가씨가 나에게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Freedom isn't a thing you should be able to give me, Miss Ginny. Freedom is something I should have been born with)."

  노예 소녀 레이첼은 부드럽고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밝힌다. 알솝 부인이 대변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단순한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첨예한 경제 논리와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 케네디를 돕는 것처럼 보였던 민병대 장교 재퍼스는 암살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는 노예제가 폐지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북부 면화 공장의 수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다. 실제로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면과 관련된 것이었다. 노예들에 의존하고 있는 남부의 면화 농장주들은 링컨의 반대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앤소니 만은 '기차'라는 닫힌 공간을 그렇게 정치적 공론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외형적으로는 느와르의 틀을 취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내재적인 메시지는 매우 정치적이다. 영화는 '링컨'이 대변하는 위대한 연방의 가치, 그리고 흑인 민권의 옹호자로서의 상징성을 신화화한다. 암살범들에게 키가 큰 링컨의 존재를 뜻하는 'The Tall Target'은 그러므로 어떻게든 지켜야할 존재가 된다. 기이한 일치로 영화 속에서 그 링컨을 암살의 위협에서 구하는 것은 '케네디'란 이름의 형사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되고 9년 후, 우리가 알고 있듯 정치인 케네디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자유와 인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매카시즘'이라는 사상 검증의 광풍이 휘몰아닥친 그 시기의 미국인들에게 링컨은 분열을 통합하는 상징적 아이콘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 색출은 단지 정치권에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사회 전체를 강타했으며, 그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당하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상원의원 매카시가 그 광풍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였다면, 노회한 정치인 닉슨이야말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 그는 이 시기에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한다.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시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영화 속 형사 케네디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안개 속과 같은 기차 안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돌아다닌다. 마침내 그의 분투로 링컨은 암살자의 손길에서 벗어난다. 용기있는 개인의 결단은 그렇게 한 사람의 대통령과 미국을 구한다. 가상의 역사물로서 'The Tall Target'은 기차라는 숨막힐 듯한 폐쇄적 공간 속에 당시 미국 사회의 분열과 정치적 독선을 은유적으로 담는다.


*사진 출처: tcm.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