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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不毛)의 미래, 老狗(Old Dog, 2011)

 

   오래전 케이블에서는 NHK 위성방송이 나왔었는데, 거기서는 매일 저녁 8시인가 9시쯤에 영화를 틀어주었다. 세계 유명 영화들, 때로는 일본 영화들이 나왔다. 쉽게 접하기 힘든 영화들도 있었는데 문제는 오직 일본어 자막만 나온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은 린제이 앤더슨의 'If....(1968)'를 보았다. 영어라고 해도 영국식 억양의 영어는 내게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아무튼 대충 일본어 자막으로 꿰맞추어 가며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나는 영화의 모든 것이 마치 벼락치듯 다가오는 느낌과 마주했다. 영화에서 언어란 그렇게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티베트어 이름으로는 페마 체덴(Pema Tseden), 중국어 이름으로는 완마 차이단(Wanma Tsaidan)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감독이 있다. 1969년생인 이 티베트 출신의 감독은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것이 여러가지다. 티베트어로 된 영화를 최초로 촬영한 감독, 티베트인으로는 최초로 북경 전영학원을 졸업한 사람. 그 페마 체덴 감독의 2011년작 '老狗(Old Dog)'을 보았다. 이 영화는 유일한 자막이 있기는 한데, 중국어 자막이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본다. 그나마 대사가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아는 한자(字)들이 나오면 대충 헤아려서 본 다음에, 줄거리도 검색해 본다.

  티베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양을 치는 늙은이가 아들 내외와 살고 있다. '곤포'라는 이름의 아들은 별 다른 할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어느날 그는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집에서 기르는 양몰이 개를 중국인 개장수에게 팔아 넘긴다. 노인은 13년 동안 가족같이 지내온 개를 팔아넘긴 아들 녀석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돈을 주고 개를 다시 찾아오려 하지만, 개장수는 돌려주지 못하겠다며 완강히 버틴다. 하는 수 없이 공안(우리나라의 경찰에 해당)인 사위를 앞세워 겨우 돌려 받는다. 다른 개장수가 노인에게 개를 팔아 넘길 것을 권유하지만 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던 와중에 개를 훔치려는 도둑이 들기도 한다. 노인은 개를 산에다 풀어주지만, 개는 그 중국인 개장수에게 다시 붙잡힌 신세가 된다. 그걸 알게된 아들은 개장수와 시비가 붙어 유치장에 갇힌다. 노인은 다시 찾은 개를 평온히 키울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한 서사와 롱테이크를 주로 하는 간명한 촬영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롱테이크는 이제 정말 한물 갔다는 것. 진짜 촌스럽다. 그렇다고 감독 페마 체덴이 영화를 어설프게 배워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그는 당시 티베트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 그런 영화적 방식이 좋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상 언어는 낡은 것이며, 그야말로 후졌다. 아마도 서구의 비평가들에게는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는 그런 모습들이 자신들의 과거 영화를 연상케하는 향수를 가져다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느리게 흘러가는 인물들의 시간, 고요한 평원의 풍경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문명과 대비되는 지점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 형식적인 측면에서 'Old Dog'은 별로 참신하다거나 칭찬받을만한 요소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끝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페마 체덴이 엮어나가는 서사에는 티베트의 현실에 대한 여러 은유들이 다양하게 내포되어 있다. 영화에서 노인은 개장수들로부터 늙은 개를 팔아넘기라는 요구를 끈질기게 받는다. 티베트 양몰이 개는 중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애완견이 되어서 꽤나 큰 돈벌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노인의 아들 곤포는 덜덜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를 누비는데, 비포장 흙길은 양과 염소, 트럭과 자동차, 오토바이가 서로 엉켜서 다닌다. 곳곳에는 신축 중인 건물들이 보인다. 건축 자재를 싣고 달리는 덤프트럭은 티벳에 불고 있는 개발의 바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흙바람 부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어디선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불경 소리다. 가난하지만 영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티베트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다.

  페마 체덴은 자신의 고향에 닥친 거대한 흐름을 비관적으로 응시한다. 노인은 아들 내외가 결혼한지 3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없자 걱정을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며느리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게 한다.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사는 아들, 그 아들이 하루종일 보는 TV에서는 중국 방송이 나온다. 술만 마시면 주정도 심하게 한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삶. 노인은 아들로부터 며느리가 불임이 아니라는 희소식을 듣지만, 이 가족이 이어갈 세대의 모습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Old Dog'이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여주는 티베트의 미래는 그런 것이다.

  티베트에서 급속도로 진행된 개발과 중국 중앙 정부의 영향력을 내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EBS의 '세계 테마 기행'과 같은 프로와 여러 여행 다큐들에서였다. 티베트인들의 삶의 방식은 이전에 비해 많이 현대화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집과 옷차림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그들은 일상에서 티베트어가 아닌 중국어를 쓰고 있었다. 언젠가 티베트에서 탱화를 제작하는 장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리는 탱화를 중국인들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사가는가를 설명하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 어쩌면 티베트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제일로 추구했던 영적 가치를 물질과 맞바꾸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불모(不毛)의 미래. 노인은 집요하고 끈질긴 개장수와 개도둑이 앞으로도 자신의 근심거리로 남아있을 것임을 잘 안다. 그에게 삶 그 자체나 다름없는 양떼와 그것을 지키는 소중한 늙은 개는 더이상 평화롭게 살 수 없다. 마침내 그는 개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의 보잘 것 없는 서사, 진부하기 짝이 없는 롱테이크,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페마 체덴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그곳 사람들이 처한 순탄치 않은 미래를 그렇게 짧지만, 통렬한 영화적 수사로 보여준다.


*사진 출처: filmex.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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