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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alia Ulman의 멋진 데뷔작, El Planeta(2021)

 

  Grey Gardens(1975). Direct Cinema(제작자의 관점을 최소화하는 다큐 제작 방식)의 기수였던 Maysles 형제는 괴짜 모녀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녀의 집은 부유층 주거지역에 자리한, 쓰러지기 직전의 폐가이다. 재클린 케네디는 모녀와 인척 관계(이모와 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어떤 사회적인 접촉도 없이, 마치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다큐는 몰락한 상류층의 음울하고도 폐쇄적인 삶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Amalia Ulman의 'El Planeta(2021)'를 보면서 나는 그 다큐를 떠올렸다. 감독 Amalia Ulman은 모친과 함께 이 영화에서 연기도 한다. 영화는 퇴거 직전의 아파트에 사는 모녀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는 여대생 레오가 어떤 남자와 커피숍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날씨에 대해 말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레오는 남자와 가격을 흥정한다. 남자가 부른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자 거래는 곧 무산된다. 그렇게 돈에 쪼들리는 여대생 레오의 매춘 시도는 허망하게 끝난다. 레오가 엄마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집세는 밀려있다. 그 집에서 살 수 있는 기한은 겨우 두 달, 패션을 전공하는 세련된 여대생과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엄마는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급전이 필요하니 집안의 가전 제품이라도 내다파는 딸과는 달리, 엄마 마리아는 천하태평이다. 식탁에 앉아서 싫어하는 이들의 이름을 적어 냉동실에 넣는다. 이 괴짜 엄마는 외출할 때는 모피와 명품으로 치장한다. 딸은 온라인 채팅에서 자신의 신분과 배경을 과시하면서 괜찮은 남자가 걸려들까 기대한다. 놀랍게도 두 모녀는 코앞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지 않는다. 돈보다는, 이제는 죽어서 곁에 없는 고양이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전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모녀가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명품으로 치장한 엄마는 좀도둑처럼 상점의 물건을 훔치다 들킨다. 딸은 낭만적 연애를 기대하며 하룻밤을 보낸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침내, 집안의 전기가 끊긴다. 냉장고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레오는 현관 앞의 전등불에 의지해 책을 읽는다. 비참해지고 슬퍼진 모녀는 서로를 비난하며 싸운다. 그들이 화해하고 한 일은? 고급 미용실에 가서 단장을 하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한다. 물론 외상으로.

  영화 속 한가롭고 평화로운 해변 도시 히혼(Gijón)의 풍광에서 스페인이 겪고 있는 오랜 경제 침체의 그림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2008년 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스페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아직까지도 그 영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서민층 주거의 불안정성이 주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자금력을 지닌 부동산 업체들은 싼값에 건물을 매입해서 임대 사업을 벌이며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집세를 내지 못한 저소득층 세입자들이 퇴거당해 길가에 나앉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감독 아말리아 울만도 퇴거의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출처: interviewmagazine.com).

  아말리아 울만은 중산층의 삶에서 급전직하하는 모녀의 모습을 그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 코미디로 비틀어 끼워넣는다. 계급 의식과 삶의 방식은 결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녀의 삶에는 도무지 처절함이라든가, 심각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마틴 스콜세지가 인근 도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가 봐야 한다며 고급 의상실에서 옷을 맞춘다. 전기가 끊겨서 촛불을 켜놓은 집에서 돌리 파튼의 흉내를 내면서 즐거워 한다. 마리아의 지독한 속물 근성과 기만적 현실 인식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종의 애잔함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닥친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도달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풍경은 스산하다. 결국 마리아는 집을 찾아온 두 명의 경찰과 함께 사라진다.

  Maysles 형제는 'Grey Gardens'에서 궁핍한 처지에 놓인 상류층 모녀의 뒤틀린 삶을 다소 착취적인 방식으로 전시한다. 재기발랄한 젊은 여성 감독은 그와는 다른 지점에서 빈곤과 계층 의식에 대한 탐구를 풀어낸다. 'El Planeta'의 레오와 엄마의 모습에는 추락하는 존재의 비감함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결코 냉소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 모녀 사이로 영화 속 배역을 소화해낸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가 주는 영향도 있다. 영화의 제목 'El Planeta'는 '행성'이란 뜻이다. 아말리아 울만에게 있어 퇴거의 경험은 낯선 행성의 삶처럼 막막했던 것일까? 영화는 그렇게 창작자의 현실을 반영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2018년에 마틴 스콜세지는 예술에 공헌한 공로로 스페인 왕실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당시 실제 뉴스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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