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흘러가는 모든 것들, Clouds of Sils Maria(2014)

 

  "시그리드는 스무 살이라구요."

  중년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 분)는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연극의 배역 시그리드를 잊을 수 없다. 시그리드는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치명적 매력을 지닌 배역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마리아에게 그 연극의 출연 제의가 다시 들어온다. 그러나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다. 그 역을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고 싫은 마리아는 자신의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시그리드 역을 맡을 수 없는 마리아의 현실을 일깨워 준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는 나이든 여배우가 직면한 현실을 그려내면서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늙음'이다. 마리아는 시그리드 역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명확히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 나이듦을 '쿨하게' 인정하고 아주 현실적이고 산뜻하게 삶을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누군가는 영화 속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 매우 젊거나, 현자이거나, 아니면 바보이거나. 

  마리아가 헬레나 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과거의 빛나는 기억에 집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에 상대역 '헬레나'를 맡았던 배우가 1년 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영 찜찜하다. 마리아는 그 배역을 맡는다는 것은 자신이 늙었으며, 배우로서도 전성기를 지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려고 하지만,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은 헬레나 역이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사야스는 마리아와 발렌틴이 그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대본 연습하는 과정을 아주 흥미있는 연출로 보여준다. 분명히 배우와 매니저의 평범한 대본 연습인데, 헬레나와 시그리드처럼 마리아가 발렌틴에게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으며 어쩌면 매혹되어 있다는 것을 관객이 알아차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 장면은 아사야스가 어떻게 배우가 가진 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지를 증명한다. 줄리엣 비노쉬가 마리아에서 헬레나로 일순간에 변모하는 놀라운 연기를 보면, 비노쉬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마리아가 가진 재능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진 충실한 매니저 역을 아주 잘 소화해낸다. 발렌틴이 시그리드 역의 대사를 할 때, 매우 절제되었지만 결국에는 마리아를 떠날 것이라는 발렌틴의 속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발렌틴은 마리아에게 현실의 시그리드였던 셈이다.

  아사야스가 '늙음'이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어쩌면 다소 진부하고 뻔하기까지 하다. 나이든 배우가 젊은 날의 기억에 집착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연극 상연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뭐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 주제를 깊이있게 다룬 작품이라면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영화 '자연의 아이들(1991)'을 보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매우 흥미롭고 좋은 영화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이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들'이다.

  마치 '배우 활용 교과서'같다는 느낌마저 주는데, 그의 '퍼스널 쇼퍼(2016)'에도 출연했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자신 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말 그렇다. 아사야스는 배우가 가진 장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영화 그 자체로 만들어내는 마법을 부린다. 솔직히 나는 그가 감독으로서의 작가적 역량이 있는가에는 그다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가 영화 속에서 배우를 쓰는 방식은 정말로 놀랍다고 생각한다. 비노쉬와 스튜어트의 좋은 연기에 더해, 클로이 모레츠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저돌적인 젊음의 매력으로 무장한 할리우드 인기배우 '조앤'역을 연기한 모레츠는 결코 비노쉬의 노련함에 밀리지 않는다. 시그리드 역으로 연극 공연을 할 때, 대선배 마리아에게 연기 훈수까지 두는 대범함과 자신감은 마치 영화 속 조앤이 모레츠 자신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 시점에서 누가 헬레나한테 신경이나 써요? 이미 볼 장 다 본 불쌍한 여자인데... 아, 선배님 말고 배역이요."

  마리아는 결국 조앤의 연기 훈수를 받아들인다. 비로소 마리아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열 여덟 살 때의 시그리드로 결코 돌아갈 수도 없으며, 세월의 흐름 속에 자신의 청춘과 아름다움이 사그라들었다는 것을... 말로야 계곡을 굽이쳐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뱀 같은 구름처럼 인생이 흘러가고 있음을 마리아가 깨닫는 것이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진정한 완성이자,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지일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매니저 발렌틴이 열차 안에서 태블릿 PC로 지도를 검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PC의 바탕 화면은 '총알이 관통한 유리창'이었다. 어쩌면 '늙음'이란, 시간과 젊음과 아름다움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가고 있음을 어느 순간에서야 확 깨닫게 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돌아보게 된 인생에 그런 구멍이 나있음을 발견하는 일. 그 인생의 구멍으로 흘러내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 매력적인 영화로 관객을 성찰하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발렌틴의 오른쪽 팔에 문신이 새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발렌틴 역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진짜 문신을 새겼다(2015년 indiewire와의 인터뷰 참조). 피카소의 '게르니카' 상단에 위치한 눈동자 문양이다.

**사진 출처: theconversation.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