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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2 상영작 리뷰 1: 시간의 조란학(2021), 다크 레드 포레스트(2021)

 

시간의 조란학(O, Collecting Eggs Despite the Times, 2021)
핌 즈비어르(Pim Zwier), 84분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진화칭(Jin Huaqing), 85분



1. 새알 연구자의 복원된 삶: 시간의 조란학(2021)

  조란학(oology)는 조류학에서 뻗어나온 학문이다. 새의 알과 둥지, 번식의 생태적 환경이 연구 주제가 된다. 지금은 새알 채취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학문의 존재 근거는 다소 희미해졌다. Max Schönwetter(1874–1961)는 그 조란학의 개요서를 쓴 독일 학자이다. 다큐 '시간의 조란학'은 쉔베터가 쓴 편지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쉔베터가 지나온 나치 독일 시기와 전쟁의 기억도 포함된다. 당시 독일의 상황을 보여주는 다양한 아카이브 필름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연구자의 지난했던 삶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나는 처음엔 이 다큐를 볼 생각이 별로 없었다. 시놉시스만 보았을 때에는 새알 연구자의 생애가 무어 그리 볼 게 있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 다큐는 놀라운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쉔베터와 지인들의 편지글에는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당시 새알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라기 보다는 수집가의 영역에 머물렀다. 쉔베터는 새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새알'이라는 분야로 확장시켰다. 비교적 부유했던 그는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새알을 수집했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서 관리했다. 그의 새알 컬렉션이 쌓이는 동안 바깥 세상은 점차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했고 독일은 전쟁의 광풍에 휩싸였다.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새알 연구자는 전장터에 가서도 새알을 모으러 다녔다. 독일이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 쉔베터도 그곳에 있었다. 그가 쓴 편지글에서는 핀란드의 숲속에서 진귀한 새알을 구하게 된 기쁨이 드러난다. 아니,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판국에도 새알을 수집하는 일 따위에 그토록 마음을 쓰는 것은 온당한가?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전쟁의 여파는 쉔베터에게도 미쳤다. 자식이 죽었고, 폭격으로 집이 불탔다. 공습으로 죽을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가 모아온 새알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는 새알 연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편지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쉔베터의 새알에 대한 관심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돈과 명예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좋아서 할 뿐인 새알 연구를 하나의 의미있는 체계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조란학 개요서를 쓰기로 결심한다. 끊임없이 동료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자문을 구하면서 쉔베터는 책을 써내려갔다. 그러는 사이 나치 독일은 패망했고, 그가 사는 곳은 동독이 되었다. 새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쉔베터는 노년의 곤궁함과 마주한다. 지인에게 돈을 부탁하는 글에서 쉔베터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저는 이제는 가난하고 늙은 노인일 뿐입니다.'

  격동의 독일 현대사 속에 펼쳐지는 어느 조란학자의 삶에는 기쁨과 눈물, 비탄이 들어있다. 아마도 누군가는 65년 동안 새알 연구에 매진한 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물을지도 모른다. 쉔베터는 필생의 역작인 조란학 개요서를 펴냈다. 그가 남긴 2만 개의 새알 컬렉션은 Halle-Wittenberg 대학 박물관에 남았다. 나에게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그의 컬렉션에는 부서진 새알도 들어있었다. 전쟁의 와중에 수집품을 온전히 보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서지고 조각난 새알의 파편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던 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거기에는 새알에 매혹된 한 사람의 오래고 고단한 삶이 담겨있다. '시간의 조란학'은 잊혀진 새알 연구자의 삶을 역사의 색을 입혀 옴스라니 복원해낸다.          



2. 수행자로 살아간다는 것: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야칭스(Yarchen Gar)는 티베트 자치주의 해발 4000m 계곡에 자리한 수행자 공동체 마을이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라 수행하는 비구니들이 한때는 1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다큐 '다크 레드 포레스트'는 그 야칭스 비구니들의 삶을 담아냈다. 내레이션이 배제된 이 다큐는 비구니들의 삶을 온전히 보여준다. 혹독한 겨울, 겨우 몸 하나 들어갈 비좁은 개인 움막을 짓고 비구니들은 치열하게 정진한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불법(佛法)과 스승의 가르침 뿐이다. 내면의 부름을 따라서 야칭스에 온 이들은 수행자로 살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렇게 죽은 수행자의 시신은 독수리들에게 내어주도록 되어 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수행에 힘쓰는 비구니들. 스승은 수행자들의 정진을 끊임없이 격려한다. 다큐 속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지도자 스님은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움을 잃지 않는다. 수행자도 인간이라 몸이 아픈 것은 당연하다. 전통 의술로 치료하는 의사에게 자신의 몸아픈 이야기를 하는 비구니들. 그들을 괴롭히는 온갖 질병은 수행이 육신의 편안함을 거스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복통을 호소하는 젊은 비구니는 무엇을 먹었느냐는 의사의 말에 명절 분위기에 휩쓸려 고기를 먹었다고 고백한다. 계율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그 모습은 인간적이다. 때로 속세의 가족은 떨칠 수 없는 걱정거리이기도 하다. 수행자들은 점을 칠 줄 아는 비구니를 찾아가 가족과 지인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도를 찾기도 한다.

  '다크 레드 포레스트'를 보는 일은 관객에게도 일종의 명상적 체험처럼 느껴진다. 붉은 모자를 쓰고 두터운 붉은색 가사를 두른 수행자들은 세속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자아는 무엇이며 깨닫는 주체는 누구인가? 비구니들은 그런 존재론적인 물음의 답을 탐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여정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명징한 목소리로 발표하는 어린 비구니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받는다. 노년의 비구니는 스승 앞에서 수행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더욱 정진할 것을 다짐한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평화롭게 이어질 것만 같았던 야칭스의 삶은 중국 당국의 정책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2019년, 중국 정부는 야칭스의 비구니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야칭스가 티베트 독립 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2017년부터 점진적으로 가해진 정부의 압력은 2019년에 이르러 야칭스 수행 공동체의 해체로 이어졌다. 다큐에는 그러한 상황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비구니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들은 과연 세속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수행만이 전부였던 비구니들은 그렇게 야칭스를 떠나야만 했다. 

  다큐의 마지막, 야칭스의 겨울 고원에서 보았던 수행자의 움막집이 어느 계곡에 점점이 박혀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야칭스를 떠난 수행자들이 더 험한 오지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꾸린듯 하다. 깨달음을 향한 비구니들의 열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혹독한 겨울에 계곡의 동물들이 굶어죽을까봐 먹을 것을 챙기는 수행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수행자가 되고 싶어요."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그런 수행자들의 기도 덕분일 것이다.


 
*사진 출처: eidf.co.kr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2019년 중국 정부에 의해 해체되기 이전의 야칭스의 모습. 중국 당국은 그곳에 대규모 호텔과 숙박 업소를 지어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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