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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를 찾아,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2021)

 

*이 글에는 다큐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2-hertz whale'이라는 별명이 붙은 고래가 있다. 고래는 종에 따라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 대부분의 고래들이 내는 소리의 주파수 대역은 40헤르츠 이하인데, 그에 비해 52헤르츠 고래는 상당히 높은 소리를 내었다. 이 고래가 어느 종에 속하는지, 이동하는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1989년 이후로 52헤르츠 고래의 존재는 계속해서 감지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Joshua Zeman은 이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52'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2021년작 다큐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는 바로 그 52헤르츠 고래를 찾는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다큐는 표면적으로는 '52'의 행방을 찾아나선 연구팀의 여정을 그리면서, 그와 함께 고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훑어 나간다. 19세기에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 사냥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석유의 발견으로 더이상 고래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포경 산업은 번성했다. 고래 고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들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6년에 해양 생물학자가 녹음한 고래의 소리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고래를 먹을거리가 아닌 함께 공존해야할 해양 생명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환경 운동과 함께 국제적인 NGO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의 활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래 무리가 자신들만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래 소리를 가장 전문적으로 연구한 곳은 미 해군이었다. 냉전시대에 소련 잠수함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다양한 정밀 탐사 장비가 사용되었다. 고래가 내는 노랫소리는 가장 많이 탐지되었다. '52'의 존재도 그렇게 알려졌다. Blue Whale 종이라고만 추측되는 이 고래는 마치 누군가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계속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파수로 소리를 내는 이 생명체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고래는 왜 혼자서, 그토록 높은 주파수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Joshua Zeman은 52 헤르츠 고래를 찾는 여정을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처럼 풀어나간다. 대양의 무수한 고래들 가운데 특정한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같았다. 그 고래가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52'에 매혹된 남자는 탐사를 위한 제작비를 모으러 다녔고, 마침내 해양 생물학자들로 이루어진 탐사팀이 꾸려진다. 그즈음 '52'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고래가 캘리포니아 해안가에서 탐지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52'의 존재를 추적하는 이 다큐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자연 다큐멘터리에는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있다. 최근작 다큐 'My Octopus Teacher(2020)'의 경우에는 다큐 제작자가 특별한 교감을 나누게 된 문어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직업적 경력과 가족 관계의 어려움에 처한 남자는 어느 문어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면의 치유를 경험한다. 사적 다큐멘터리와 자연 다큐멘터리의 이 기묘한 조합은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도 그러한 면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52'는 소통할 대상이 없이 홀로 높은 소리를 낸다는 사실만으로 가장 외롭고 특별한 고래가 되어버린다. 그 고래가 진짜 외로운지 우리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52'를 찾아 나서는 이 다큐의 관점은 지극히 인간중심적이다.

  결국 탐사팀은 '52'를 찾지 못하고 추적을 끝마친다. 하지만 이 다큐의 마지막에는 작은 반전이 들어있다. '52'가 내었던 소리로 응답하는 두 마리의 고래가 탐지되었다. 고래들은 무리마다 특유의 지역 방언(dialect)을 쓰는데, '52 헤르츠'는 그러한 고래 방언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소 허망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여정에는 무언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진다. 다큐는 거대한 해양 생명체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지켜주어야할 책임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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