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도 조, 무국적의 총잡이가 되다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拳銃は俺のパスポート, A Colt is My Passport, 1967)
노무라 타카시(Nomura Takashi) 감독
여기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배우로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가졌지만 그저 그런 단역들만 주어질 뿐이었다. 적당히 잘생긴 자신의
얼굴로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성형 수술로 개성을 가진 마스크를 만드는 거다. 시시도 조(Shishido Joe)는
광대뼈 부분에 실리콘을 넣은 새로운 얼굴의 배우가 되었다. 성형 수술 이후 그의 양볼은 마치 사탕을 두어 개 물고 있는 것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그런 이유로 그에게 '다람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독특한 얼굴 덕분이었을까? 그는 액션 영화에서 총잡이
역할로 잘 나가기 시작했다. 영화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A Colt is My Passport, 1967)'는 시시도 조의 대표작이다.
시시도 조가 이 영화에서 맡은 역은 저격수 카미무라이다. 카미무라는 야쿠자 보스의 의뢰로 다른 조직의 야쿠자 보스를 암살한다.
그는 일이 끝나면 돈을 받고 외국으로 나가기로 되어있다. 하지만 조직은 카미무라를 적당히 써먹고 처리해 버리려고 한다. 카미무라는
파트너 슌과 함께 야쿠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부둣가 근처의 선술집으로 숨어든 두 사람, 그곳에는 거친 밑바닥 삶을 사는
여성 미나가 있다. 미나는 카미무라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카미무라는 미나의 도움으로 밀항의 기회를 잡지만, 그러는 사이 슌은
야쿠자들에게 끌려간다. 슌을 풀어주는 대신 자신이 야쿠자들과 대면하기로 한 카미무라. 폐허의 매립지에서 고독한 총잡이는 야쿠자들을
상대로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총잡이와 일본 영화라니, 무언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스파게티 웨스턴(Spaghetti Western)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그대로 모사했다는 인상을 준다. 엔리오 모리코네를 연상케 하는 영화 음악, 외로운 늑대처럼 방랑하는 총잡이,
그와 대적하는 악당, 그리고 마지막 결투까지 이것은 일본 스타일의 서부극이다.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된 데에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다. TV의 보급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 산업의 황금기는 점차 저물어가고 있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영화사
Nikkatsu(日活)는 그런 시대적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했다. 철저히 대중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의 오락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시하라 유지로를 간판으로 한 태양족(太陽族) 영화부터 일련의 Borderless Action 영화를 제작했다. Borderless Action 영화는 말 그대로 웨스턴과 느와르의 장르적 요소를 과감히 차용한 무국적성을 특징으로 한다.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에서 카미무라는 전형적인 서부극의 반영웅(anti hero)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사회와 그 어떤 접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은 파트너 '슌'이다. 슌은 카미무라를 '아니키(アニキ)'로 부른다. 이는 우리말의 '형님', 중국어로는 '따꺼(大哥)'의 어감이라고나 할까? 야쿠자들 사이의 일반적인 호칭이기도 한 '아니키'에는 서구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적 배경이 자리한다. 영어 자막에는 '아니키'가 여지없이 'Boss'로
번역되는데, 이 부분이 영 어색하게 읽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친형제는 아니지만 목숨을 내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
그러므로 미나는 카미무라에게 슌이 친동생인지 물어보기까지 한다. 슌에게 '아니키'로 불리는 카미무라는 기꺼이 그 말에 합당하게
행동한다.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서 음지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 영화는 전후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룬 일본 사회의 그늘진 부분을
부각시킨다. 카미무라와 대척점에 서있는 야쿠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합법과 불법의 회색지대에서 기생하는 야쿠자 대부분은 하층민
출신이었다. 부둣가 선술집 미나의 경우도 일종의 차별적 천민 집단에서 나고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사가 나온다. 그 때문에 미나의
과거는 그곳을 매번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로 점철되어 있다. 카미무라처럼 미나도 떠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는 일본
너머의 바깥 세상이다.
경계에 자리한 이들의 탈주 욕망. 이것이 좀 더 구체화된 모습으로 드러난 영화는 니카츠 제작 영화 '나는 기다린다(俺は待ってるぜ, I Am Waiting, 1958)'이다.
전직 권투 선수인 시마키(이시하라 유지로 분)는 브라질 이민을 꿈꾼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수감 생활의 고통스런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브라질행은 시마키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먼저 브라질로 떠난 형은 정착 후에 시마키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형은 감감무소식이다. 야쿠자에 의한 형의 죽음, 결국 시마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시마키 형제에게 닥친 비극은 일본
사회 하층 계급의 좌절된 욕망을 보여준다.
슌과 미나가 부산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것과는 달리, 카미무라는 황량한 매립지에 홀로 서있다. 그를 지탱해주는 것은 총 한
자루뿐이다. 방탄 차량에 탄 야쿠자들이 카미무라를 향해 돌진한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은 결투. 마침내 고독한 총잡이가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적들이 죽었음을 확인한다. 절뚝이며 걷는 이 남자가 살아갈 세계는 이제 '일본'이 아니다. 총과 먼지 바람,
악당들, 그리고 언젠가 가게 될지 모르는 이국의 땅까지. 카미무라, 아니 시시도 조는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로
Borderlss Action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각인된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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