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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다큐멘터리의 모범, 나는 모건을 죽였다(I Called Him Morgan, 2016)

 

  1972년 2월 19일, 뉴욕의 재즈 클럽 Slug's Saloon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유명한 재즈 트럼펫 연주자 리 모건(Lee Morgan). 그에게 총을 쏜 사람은 사실혼 관계의 부인 헬렌 모건(Helen Morgan)이었다. 엄청나게 많이 내린 눈 때문에 구급차는 늦게 도착했고, 모건은 결국 사망했다. Kasper Collin 감독의 다큐 '나는 모건을 죽였다(I Called Him Morgan, 2016)'는 그 두 사람의 삶과 사건에 얽힌 뒷이야기를 담아낸다.

  이 다큐의 주된 내레이션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헬렌 모건의 음성으로 진행된다. 재즈 칼럼니스트인 래리 레니 토마스(Larry Reni Thomas)는 자신의 강의를 듣던 헬렌 모건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8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2개의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헬렌은 세상을 뜬다. 다큐에는 그렇게 이미 고인이 된 헬렌의 증언, 리 모건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그 비극적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리 모건의 여자 친구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 목소리들은 리 모건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트럼펫 선율을 배경으로 차분하게 그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을 향해 흘러간다.

  사실 다큐의 우리말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인데, 아마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이 제목은 메리 해런 감독의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1996)'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명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총격을 가한 과격한 레즈비언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 전도 유망한 재즈 트럼페터를 총으로 쏜 부인. 그러나 이 다큐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메리 해런 영화처럼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제목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사건의 그날 밤. 재즈 클럽에는 리 모건의 여자 친구가 와있었고, 마침 클럽에 들른 헬렌은 그 장면을 보고 격분한다. 그리고 일어난 총격 사건은 어찌 보면 젊은 남편의 애인을 질투한 늙은 마누라(헬렌은 리 보다 13살 연상이었다)의 너저분한 치정 살인처럼 보인다. 다큐 제작자로서 그런 이야기는 '대박 아이템'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캐스퍼 콜린은 아주 좋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결코 욕심을 내지 않고 이야기 뒤에 숨겨진 것들을 탐구해 나간다.

  테이프에 담긴 헬렌의 육성은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간 헬렌은 리 모건을 만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헬렌을 만날 당시의 리 모건은 잘 나가던 재즈 연주자에서 마약 중독자로 밑바닥 삶을 전전할 때였다. 그런 리를 헬렌은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마치 어린 아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것 같더군요."

  헬렌을 잘 알던 이웃은 그 시기의 헬렌의 모습을 그렇게 회고했다. 다시 화려하게 재기한 리 모건과 그의 모든 것을 보살피는 매니저 겸 부인의 역할을 자처한 헬렌. 잘 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바람'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두 사람은 법적 부부가 아니었으므로. 리에게는 단지 젊은 여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여자 '친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다큐에 나오는 리의 여자 친구는 매우 담담하게 리와 자신의 관계를 증언한다. 어쨌든 헬렌은 그런 리의 '외도'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하게 만든다.

  결국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리 모건은 사망한다. 재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다큐는 그 비극이 일어난 2월의 눈오는 밤으로 관객을 천천히, 조용하게 이끌어 간다.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리 모건의 연주는 그 짧은 삶만큼이나 슬프고 쓸쓸하다. 그리하여 이 다큐의 마지막에서 관객이 만나는 것은 인생과 음악과 어떤 사랑의 모습이다. 자극적이고 통렬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캐스퍼 콜린은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 의식과 창작자로서의 상상력, 그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영화가 가진 본연의 의미, 즉 타인의 삶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는 데에 이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음악 다큐의 최고봉은 여전히 빔 벤더스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다큐에 나온 이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나이가 90이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음악 다큐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질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좋은 음악 다큐를 떠올릴 때, 'I Called Him Morgan'을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이다. 헬렌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성씨로 불렀다. 지극한 사랑으로 인생의 나락에서 일어난 남자는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삶을 마감한다. 그 끔찍한 비극 뒤에 가려진 어떤 인생과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 담담한 시선으로 관조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정말로 좋은 음악 다큐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icalledhim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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