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추리극의 외투를 입은 정치적 서사, Knives Out(2019)

 

*이 글에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는 어떤 면에서 범죄 수사물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 드라마로 인해 시청자들은 범죄 현장에서의 증거 수집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증거 분석에 사용되는 온갖 첨단 기법과 부검 과정에서 밝혀지는 의학적 사실도 접할 수 있었다. 증거물의 분석 과정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놀랍도록 사실적인 화면에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그런 것에 익숙한 오늘날의 관객에게 Rian Johnson의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은 좀 뜬금없는, 아주 구식의 추리물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추리 소설 작가로 부와 명성을 쌓아온 할란 트롬비는 85세 생일 다음날, 자신의 저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타살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경위 엘리엇과 부하 경관 와그너,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 분)이 할란의 저택을 찾는다. 트롬비 일가는 생일 저녁 각자의 행적들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고, 그 와중에 할란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일가족들의 혼란과 분노는 극에 달한다. 놀랍게도 할란의 저택, 책의 저작권을 비롯해 모든 재산이 그의 건강을 돌보던 고용 간호사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 분)에게 상속된 것. 과연 할란의 죽음은 타살일까, 자살일까? 마르타가 그의 재산을 전부 상속받는 것은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모든 이야기가 러닝 타임 130분에 걸쳐서 펼쳐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영화화한 일련의 작품들을 기억하고 있는 영화팬들이라면 이런 고전 추리물의 귀환은 꽤나 반갑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영화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르큘 포와로를 꼽으라면 피터 유스티노프일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작품 'Murder on the Orient Express(1974)'은 앨버트 피니가 포와로 역으로 나왔지만, 'Death on the Nile(1978)'을 본 관객들은 유스티노프를 포와로의 환생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약간의 허세와 유머 감각 뒤에 숨겨진 치밀하고 이지적인 면모를 보여준 포와로의 모습을 유스티노프는 아주 잘 연기해냈다. '나이브스 아웃'의 사립 탐정 블랑은 그런 포와로의 모습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무뚝뚝하고 뭔가 어설픈듯이 보이지만 냉철한 수사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 영화에서 균형감을 가진 심판자, 중재자 역할로 나온다. 

  '나이브스 아웃'은 13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을 즐겁게 속주(奏)한다. 트롬비 일가 구성원들 사이 얽히고 설킨 애증의 비밀이 잘 포장된 초콜릿들을 하나씩 까먹는 것처럼 펼쳐진다. 관객들은 마침내 노 추리작가의 죽음에 가려진 진실을 알게 되고, 마르타가 고귀한 승리를 쟁취했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추리극의 외피 안쪽에 아주 분명한 정치적 서사를 펼쳐 놓는다.

  할란의 생일날 저녁에 일가족들이 모여서 트럼프의 이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할란의 셋째 아들 월트 부부와 그 아들은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조니와 그 딸 메그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렇게 트롬비 일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 보면, 뭐랄까, 미국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들을 대변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이들이 '돈' 앞에서는 하나로 똘똘 뭉친다. 정작 한 푼의 유산도 일가족 누구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교양이라는 덕목으로 장착된 모든 것들을 내던진다. 셋째 아들 월트는 마르타의 어머니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상속 포기를 종용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메그조차 자신의 대학 등록금과 미래 앞에서 마르타와 대립한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이 추리극이 여러 정치적 수사로 가득차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할란의 저택은 그 자체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변한다. 영화 말미에 블랑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 집은 파키스탄 사람에게 헐값에 사들인 것으로 트롬비 일가의 근원적 부의 시작은 이민자의 집이었다.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단검이 장식된 의자는 폭력과 갈등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이다.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과 박해, 시민 전쟁으로 부르는 남과 북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온 노예제와 흑인 차별, 그리고 오늘날의 배타적인 이민자 정책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세력들 사이의 칼을 빼든(knives out) 대립의 역사였다.

  마침내 마르타는 정당하게 할란의 유산 상속자 자격을 획득한다. 할란이 늘 쓰던 컵을 들고 2층의 테라스에서 마당에 서있는 트롬비 일가를 바라본다. 컵에는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My House, My Rules, My Coffe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할란을 성심껏 간호한 노력을 봐서 나중에 보살펴 주겠다고 짐짓 선심을 썼던 셋째 아들 월트를 비롯해 나머지 가족들은 마르타의 호의를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속물 근성에 찌들리고,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돈을 물쓰듯 하며, 속임수와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서로를 위선으로 대했던 트롬비 일가는 할란의 진정한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마치 할란의 저택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당한 주인은 이민자들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건의 해결로 마르타의 결백을 입증한 탐정 브누아 블랑의 이름이 가진 뜻을 되새겨볼만 하다. 그의 이름 자체가 참 흥미로운데, '브누와 블랑(Benoit Blanc)'은 '축복받은 백색'이란 뜻이다. '백인됨(Whiteness)'은 미국의 역사에서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 정치, 문화, 다양한 배경들이 직조된 미국의 주류 지배 계층의 특질이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나이브스 아웃'을 통해 그 '백인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불법 이민자들을 향해 가해졌던 비인간적인 처우와 정책들은 '백인됨'의 극우적 속성을 보여준다. 그런 편향된 가치가 아니라 공정성과 합리성, 이성적 사고를 가진 '백인'으로서의 브누와 블랑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미국에 필요함을 역설한다.  

  미국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뜻하는 'Trumpism'이 트럼프의 퇴임 이후에도 금새 청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가져온 분열과 대립, 백인우월주의와 극우주의 세력의 부상이 결코 쉽게 사그라들 수 없는 것임을 미국 내에서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브스 아웃'은 오늘날의 미국이 직면한 정치적 격변기에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련된 은유를 추리극의 외투를 덧입혀 보여준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그 외투 안쪽에 자리한 정치적 서사를 놓치지 않고 볼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newsweek.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