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Memento Mori, 미세스 팡(Mrs.Fang, 2017)

 

  "점점 가라앉는 것 같아요. 침몰하는 배처럼..."

  비좁은 팡 부인의 방에는 아들과 딸 내외를 비롯해 친척들로 북적인다. 68세의 팡 부인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살거죽이 드러난 초췌한 얼굴, 가느다란 팔, 촛점을 잃은 눈동자, 입을 반쯤 벌리고 겨우 내쉬는 숨은 이제 곧 죽음의 소식이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왕빙(王兵, Wang Bing)의 '미세스 팡(Mrs.Fang, 2017)'은 임종을 앞둔 노인과 그 가족의 모습을 담아냈다. 죽어가는 이의 모습이 마치 서서히 물에 가라앉는 배를 떠올리게 한다고 가족 중 누군가 말한다.

  임종의 과정은 길게는 몇 주, 짧게는 며칠이다. 죽음을 앞둔 이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는데, 장에서 더이상의 영양소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치매나 다른 혼수성 질환이 아니라면 깨어있을 때의 의식은 또렷하지만, 대개는 가수면(眠) 상태로 누워있다. 호흡이 불규칙해지는 시점은 이제 임종의 과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Death Rattle'이라고 알려진 그르렁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말은 할 수 없는 상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듣는 것은 가능하므로, 이때 가족들은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넬 수 있다. 내가 본 임종의 모습은 그러했다.

  다큐의 첫 화면은 비교적 정정한 모습으로 자신의 방에 서 있는 팡 부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사망하기 전 해의 가을이다. 해를 넘겨 여름의 초입인 6월에 이르자 부인의 상태는 악화된다. 다큐의 대부분은 열흘 동안의 팡 부인과 가족의 일상을 찍었다. 팡 부인의 주변 침대와 의자에 이리저리 흩어져 앉아있는 가족들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자신들의 일상을 비롯해 부인의 장례 절차에 대한 의논도 하고, 죽음의 징후가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토대로 부인의 상태를 가늠하기도 한다. 간호를 맡은 가족은 부인의 등에 생긴 욕창 때문에 수시로 자세를 옮겨주기도 하고, 주사기로 물을 입안으로 흘려 넣어 마시게도 한다.

  카메라는 팡 부인의 얼굴을 상당히 오랫동안 비춘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화면 속 부인의 임종 과정을 함께 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낯선 경험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것은 고통스럽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부인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는 촬영을 인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지점에서 감독 왕빙이 얼마나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의문을 품는다. 과연 팡 부인은 이 다큐의 촬영을 허락했다고 볼 수 있는가? 부인의 인지기능은 치매로 손상된 상태다. 엔딩 크레딧에 보여지듯 자녀들의 촬영 동의를 얻은 것에 대한 감사와는 별개로, 팡 부인이 이 다큐의 촬영을 허락했다고 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이 다큐의 뭔가 생경하고 기이한 지점은 죽어가는 이의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팡 부인의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이 그러한데, 특히 남자들이 동네와 접한 천변에 나가 뱀장어며 물고기를 탐욕스럽게 잡아들이는 모습들이 꽤 비중있게 나온다. 물고기가 잘 잡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계속 찾아다니며,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킨 물고기를 상당히 많이 건져올린다. 그 지역에서 여름에 그렇게 물고기를 잡는 것은 귀한 식재료를 얻는 일이므로 놓칠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집요하게 취하는 그들의 모습은 관객에게 긴장과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알록달록한 이불을 덮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겨우 숨을 내쉬고 있는 팡 부인의 주변에는 온갖 소음이 가득하다. 도박을 하다 돈을 잃었다는 이야기며, 아는 누구의 이혼 소송 이야기도 나온다. 방안의 TV는 항상 켜있다. 이웃들은 밖에서 떠들썩하게 음식을 먹으며 자신들이 본 죽음의 모습과 팡 부인의 손자들은 왜 안오는지,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그랬다. 팡 부인의 마지막 날들에 주변은 그렇게 시끄러웠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 무례하거나 상스럽게만 보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자들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드디어 팡 부인에게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에 카메라는 거리를 두고 비켜서 있다. 부인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관객은 부인이 세상을 떠나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왕빙 감독은 그 지점에서 물러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가족들에게만 허락된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소음은 사라졌고, 대신 나즈막하게 읊조리는 기도문과 조용한 흐느낌이 그 작은 방을 채운다. 팡 부인의 마지막은 그러했다.

  러닝 타임이 1시간 26분 정도인 그리 길지 않은 다큐이지만, '미세스 팡'을 보는 일은 꽤나 복잡하고 괴로운 감정을 수반한다. 알지도 못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며, 관객은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죽음'의 기억과 함께 그와 관련된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불편하고 낯설며, 보다가 그만 두고 싶은 마음마저 드는 그 순간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죽음을 기억하시오(Memento Mori).' '미세스 팡'은 감독 왕빙이 그려낸 바니타스(Vanitas)인 셈이다.


*사진 출처: sabzian.be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