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2편: 어느 멋진 일요일(素晴らしき日曜日, One Wonderful Sunday, 1947)


어느 멋진 일요일(素晴らしき日曜日, One Wonderful Sunday, 1947),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Akira Kurosawa)


2.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려낸 전후 청춘 세대의 초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는 자꾸만 땅바닥을 내려다 본다.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누가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꽁초를 주워든다. 그때, 남자에게 다가온 젊은 여자가 책망하듯 남자의 손등을 가볍게 친다. 그제서야 남자는 멋적은듯 꽁초를 떨어뜨린다. 남자와 여자는 연인 사이이다. 일요일,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 친구를 보아도 그다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이 남자의 행색은 꾀죄죄하다. 그렇다. 그에게는 돈이 없다. 막상 여자 친구와 만나 돌아다니려고 생각하니 남자는 자신의 비어있는 지갑이 신경쓰인다. 여자 친구는 약간의 용돈을 가지고 있다며 남자를 안심시킨다. 과연 이 연인들은 멋진 일요일을 보낼 수 있을까...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은령의 끝(銀嶺の果て, Snow Trail, 1947)'이 개봉된 그 해에 영화 '어느 멋진 일요일(素晴らしき日曜日, One Wonderful Sunday, 1947)'을 선보였다. 이 영화는 가난한 연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마사코와 유조, 수중에 35엔 밖에 없는 연인들의 데이트는 지지리도 궁상맞다. 가진 돈이 별로 없으니 마땅히 갈만한 데도 없다. 마사코는 교외에 있는 견본 주택 전시장이 입장료가 무료이니 가보자고 제안한다. 두 사람이 가서 본 견본 주택은 가격이 10만엔에 이르는 멋진 집이다. 마사코는 유조에게 언젠가 자신들이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지 않겠냐고 꿈을 갖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친구집에 얹혀 사는 백수 신세인 유조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가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마사코와 유조의 데이트 여정을 통해 전후 일본의 황폐한 풍경을 펼쳐놓는다. 동네 꼬마 아이들이 야구를 하는 공터에는 어린 동생을 업고 나온 소녀와 배고픈 아이도 있다. 유조는 자신이 사게된 만두를 그 배고픈 아이에게 건네준다. 유조가 혹시라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간 지인의 가게를 찾아가 본다. 그곳은 카바레(cabaret)였다. 비싼 옷을 입은 손님들 사이에서 유조의 차림새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유조의 지인은 끝내 유조를 만나주지 않는다. 지배인은 지하 주방에서 남은 음식을 쥐어주며 유조를 내쫓는다.

  길거리의 벤치에서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마사코와 유조. 거지 소년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마사코는 10엔을 건넨다. 하지만 거지 소년은 두 사람의 처지가 더 딱해보인다며 그들을 비웃는다. 마사코와 유조가 교향악단의 음악회에 가보려고 했더니,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B석은 매진이다. 암표 장사와 표값을 두고 다투던 유조는 암표 장사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가난한 연인들은 오갈 데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유조의 자취방에 가지만, 낡은 자취방의 천장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마사코는 세숫대야를 찾아내어 떨어지는 빗물을 받는다.

  마치 네오리얼리즘(Italian neorealism) 영화를 보는듯한 '어느 멋진 일요일'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적 각인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에는 전후의 도쿄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겨져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카메라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마사코와 유조가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역동적으로 인물과 전철의 움직임을 담는다. 구로사와는 상하(上下), 좌우(左右) 방향으로의 이동을 리듬감있게 편집된 시퀀스로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그의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Seven Samurai, 1954)'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농부들은 수확한 곡식을 훔치려는 도적떼에 맞서 사무라이들을 고용해서 자경단을 꾸린다. 영화는 두 집단의 치열한 대치와 결투에 이르는 긴 여정을 담아낸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카메라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인물들의 동적인 움직임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어느 멋진 일요일'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전후의 청춘 세대들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 같다. 가진 것이라고는 '젊음'뿐인 하층 계급의 연인들은 전후의 상흔이 선명한 도쿄 곳곳을 유랑한다. 돈에 쪼들린 연인들의 행색은 초라하게만 보인다. 일요일 데이트가 끝나갈 저녁 무렵, 연인들은 텅 빈 야외 음악당을 발견한다. 마사코는 유조에게 그의 관객들로 가득찬 음악당을 상상하며 가상의 악단을 지휘해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마사코와 유조가 좋아하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음악당을 가득 채운다. 희망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마음으로 무언가를 건져 올려내는 일이다. '어느 멋진 일요일'에는 폐허의 잔재 위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의 초상이 아로새겨져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암울한 청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한줄기 희망의 빛을 드리우는 일을 잊지 않는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