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큰 저택을 청소할 수 있겠어?"
여자는 자신의 가사 도우미들에게 웃으면서 그렇게 묻는다. 여자는 한창 건축 중인 자신의 대저택을 둘러보는 중이다. 이 집은 여자에게는 평생의 숙원과도 같다. 여자는 그 집에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관사 'The'가 붙지 않았으니, 진짜 베르사유 궁전의 미국판쯤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어마어마한 저택이기는 하다. 여자의 이름은 재키, 남편은 데이비드 시겔. 미국에서 부동산과 리조트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재력가이다.
Lauren Greenfield가 2012년에 제작한 다큐 '베르사유의 여왕(The Queen of Versailles)'은 재력가 부부의 화려한 일상을 촬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무려 17개의 욕실이 있는 대저택인데, 새로 짓는 베르사유 궁전은 30개가 될 거라고 재키는 자랑한다. 오랫동안 재키는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본떠서 만드는 새 저택에 어울릴 온갖 앤티크 가구들이며 장식품들을 사들였다. 그것들을 보관하는 전용 창고까지 있을 정도다. 이제 그 '꿈의 집'이 지어지기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고 생각한다.
부자라고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2007년,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 위기가 이 부부의 일상을 뒤흔든다. 거칠 것 없었던 사업은 자금 흐름이 막히면서 직원들의 대량 해고, 은행의 압류, 자산 매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다큐를 제작하는 감독에게 이건 생각지 못한 '호재'였는지도 모른다. 급전직하하는 부자의 모습을 담아낼 기회가 흔하겠는가? 꿈의 집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은 중단되고, 그들이 살고 있는 대저택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긴다.
입양한 재키의 조카 한 명을 비롯해 여덟 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와 가사 도우미들,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이 우선 줄어든다. 그러자 집안은 재키가 키우는 개들의 배설물들이 나뒹굴며, 수족관의 물고기와 키우던 도마뱀이 죽어 나간다. 주방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제멋대로이며 어질러 놓기 바쁘다. 은행에서는 데이비드의 돈줄을 막고 있고 그는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재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남편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준다며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도 한다. 재키는 34세에 결혼한 이후로 그렇게 물쓰듯 돈을 쓰며 살아왔다. 그때 데이비드의 나이는 65세. 그는 2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사업가로 재키는 흔히 말하는 그의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였다.
재키의 인생 역전은 미인대회에서 시작되었다. 공대를 나와서 엔지니어로 IBM에서 일하기도 했던 여자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칸막이 사무실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뉴욕으로 가서 모델일을 하다가 미인 대회에 출전한다. 데이비드를 만난 것도 그 대회의 파티에서였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꽤 순탄하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돈 가뭄'에 늙은 남편은 화가 난 상태고, 여자는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은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다. 이 부부는, 그리고 이 집의 아이들은 이 위기를 잘 견딜 수 있을까...
감독 로렌 그린필드는 재력가 부부의 삶에 닥친 풍랑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거기에는 부자들의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고용인들의 목소리도 들어있다. 재키의 아이들을 돌보는 필리핀 유모는 돈을 벌어서 죄다 고국의 가족들에게 부친다. 정작 자신의 어린 아들은 못보고 지낸지가 꽤 되었다. 유모에게는 부양해야할 친정 식구들도 여럿이다. 화려한 저택에서 떨어진 한 귀퉁이 작은 조립식 건물은 오로지 침실 한 칸으로 되어있다. 침대는 접이식으로 매우 비좁은 공간이다.
"우리 아버지는 시멘트로 된 집 한 채를 갖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그리고 결국 시멘트 무덤에 누워계세요."
필리핀 보모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훔친다. 자신이 돌보는 이 집구석의 아이들은 이미 수십 대의 자전거가 있는데도 월마트에 가서 자전거며 장난감과 물품들을 미친듯이 사들인다. 그렇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재키는 남편의 사업이 어찌 되든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값비싼 캐비어 통조림으로 달랜다. 보톡스 시술도 거를 수 없다. 이 여자는 자신의 베르사유 궁전이 지어지지 못할까봐 가슴 아프고 조바심이 난다.
다큐는 이 부부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는 도중에 끝이 난다. 세상에서 부자 걱정하는 게 가장 쓸데없는 일이다. 이 부부의 현재는 평화롭다. 데이비드의 사업은 위기를 넘겼고, 재키의 베르사유 궁전은 이제 곧 완공을 앞두고 있는 모양이다. 이 대저택은 미국에서 4번째로 값나가는 집이며, 추정가만 해도 3400억이다. 팔려고 내놓아도 살 만한 사람이 별로 없을지 모른다. 재키의 꿈은 이뤄질 것이다.
그런데 이 다큐의 반전은 부자의 시련과 곤궁(?)을 그려낸 것에 있지 않다. 이 다큐는 그 화제성 덕분에 2012년 선댄스 영화제, 브리스번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데이비드 시겔의 심사가 무척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다큐로 자신의 사업체와 관련된 명예가 손상되었다며 제작을 지원한 미국 독립 영화 협회(IFTA)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무려 3년에 이르는 법적 공방이 계속 되었다. 결국 다큐의 저작권에 일정 부분의 지분을 갖는 것으로 감독과 제작사는 합의를 해야했다. 부자 성질 건드리면 뒤끝도 그렇게 지독하다.
문득 오래전 공부할 때 들었던 '영화와 법' 강의가 떠오른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루는 강의였다. 변호사 양반이 퇴근한 늦은 저녁에 하는 강의였다. 한 학기 동안 배우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랬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에 그리 관대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 명예 훼손은 '사실의 적시(摘示)'와는 관계없이 적용되는 죄목이라는 것. 어쨌든 만약에 대비해서 영화 제작을 하는 이들은 제작의 마지막 단계에서 법률적 조언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다큐 제작의 경우에는 실제 인물과 사건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더 많은 것들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르사유의 여왕'은 돈이 썩어나가게 많은 부자에게 닥친 꽤나 심각한(?) 일상의 위기를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잘 포착해 낸다. 그것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이 다큐가 그 궁금증을 조금은 풀어줄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부자라고 해서 그렇게 삶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은 관객이 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재키의 첫째 딸 빅토리아는 2015년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떴다. 부부는 딸에게 생긴 비극을 이 다큐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다큐를 본 이들이라면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대저택에 사는 그 가족들의 내면이 무질서와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베르사유의 여왕'이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dogwoof.com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