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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삶에 대한 응축된 편린, Return to Seoul(2022)

 

*이 글에는 영화 'Return to Seoul(2022)'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9년, 한국의 방송국 MBC에서는 스웨덴 입양 여성 수잔 브링크(Susanne Brink)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었다. 오랜 이별 끝에 마침내 친모와 재회하게 된 입양 여성의 사연은 많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 사연은 곧 영화로 만들어졌다. 장길수 감독의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Susanne Brink's Arirang, 1991)'이 그것이다. 나는 1989년의 다큐멘터리도, 그 후에 만들어진 영화도 모두 보았었다. 또한 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 수잔 브링크(한국 이름 신유숙)가 암투병을 하다가 삶을 마감했다는 후일담까지도 잘 알고 있다. 수잔 브링크를 알고 있는 한국 관객이라면 영화 'Return to Seoul(2022)'에서 기시감(旣視感)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 국적의 캄보디아 이민자 출신의 Davy Chou 감독은 자신의 한국인 입양아 친구에게서 이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프레디(Freddie)'. 한국 입양아 출신의 이 프랑스 여성은 태풍으로 취소된 항공편 때문에 한국에 잠시 체류한다. 2주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프레디는 입양 기관을 통해 친부모를 만나고 싶어한다. 친부가 프레디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과는 달리 친모는 만남을 거부한다. 친아버지가 있는 군산에 간 프레디, 프레디는 3일 동안 할머니와 친아버지의 가족과 지낸다. 친아버지와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레디가 느낀 거리감과 문화적인 장벽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프레디는 끊임없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연락을 취하려는 아버지를 싫어하게 된다. 영화는 그 일로부터 2년 후, 5년 후, 그리고 프레디가 서른 한 살이 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펼쳐서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을 여는 노래는 신중현(Shin Jung-hyun) 작사 작곡의 노래 '꽃잎(Petals, 1967)'이다. 노래에는 꽃잎이 지는 날에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 하는 이의 마음이 담겨있다. 서울의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 프레디는 접수 직원 티나가 헤드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것을 본다. 프레디는 티나에게 그 노래 '꽃잎'을 들려달라고 말한다. 소리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은 프레디가 이후에 보여주는 음악과 춤에 대한 재능과도 결부되어 있다. 프레디는 매우 직선적이고 저돌적 성향의 사람이다. 프레디는 처음 만난 술자리의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가 하면, 낯선 남자와의 하룻밤 잠자리도 거리끼지 않는다.

  프레디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할 뿐, 타인의 감정은 배려하지 않는다. 프레디는 친부의 관심을 거칠게 밀쳐낸다. 또한 프레디는 자신에게 진지한 호감을 표현하는 한국인 남자를 모욕한다. 한국 사람들은 프레디를 '한국인'으로 생각하며 그들과 프레디가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인 입양 여성 프레디는 자신을 프랑스인(French)으로 소개하며, 다시는 한국으로 오지 않겠다고 말한다. 프레디는 친아버지가 길거리 좌판에서 사준 분홍색 구두를 숲길에 내다버리고 한국을 뜬다. 아마도 프레디에게 있어 한국에서의 첫 체류는 그렇게 내다버리고 싶은 불유쾌한 기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25살 프레디의 이야기는 1부에 해당한다. 어떤 면에서 그 1부가 David Chou 감독이 친구의 실제 경험담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라면, 이후에 이어지는 영화 속 이야기는 캄보디아 이민자 출신의 감독이 창조해낸 이질적인 산물처럼 느껴진다. 2년 뒤, 27살의 프레디는 서울에서 프랑스인 무기 거래상 앙드레와 만남을 갖는다. 마침 생일을 맞은 프레디는 남자 친구가 준비한 깜짝 생일 파티에서 춤을 추고 논다. 이 파티와 여기에 참석한 이들의 면면이 보여주는 생경함은 한국이 아니라 어느 외국 대도시 나이트 클럽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프레디는 서울의 허름한 뒷골목 안에 자리한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프랑스인 무기 거래상 친구가 있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 속에 있다. 그런 프레디의 내면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친모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한다. 그것은 또래 입양인 출신 여자 친구와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마침내 30살이 된 프레디는 남자 친구 막심과 함께 한국을 찾는다. 무기 중개상이 된 프레디가 막심, 친아버지, 고모와 함께 한식집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장면은 흥미롭다. 프레디는 친아버지가 보낸 이메일은 스팸메일로 분류하고, 그를 귀찮게 여겼었다. 그러나 이제 프레디는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아버지를 대한다. 무엇보다 프레디는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조금이나마 구사할 줄 안다. 5년이라는 세월은 프레디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식사 자리에서 프레디는 태국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를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프레디는 수술한 어깨의 흉터를 아버지에게 만져보라고 말한다. 프레디는 25살 때, 서울로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가 프레디를 훈계하며 딸의 팔을 붙잡으려고 하자, 만지지 말라며(Don't touch me!) 악을 썼었다. 혈육지친(血肉之親), 그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이제 관객은 프랑스인 '프레디'가 아닌 한국 이름 '연희'가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서있음을 본다. 

  입양 여성 프레디가 '연희'라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진정으로 내면에 받아들이는 여정은 친모와의 만남에서 정점을 이룬다. 프레디는 그동안 연락을 거부했던 친모와 만나게 된다. 프레디는 친모와의 단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눈물을 흘린다. 입양아로서 생물학적 부모의 존재를 찾는 일은 프레디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신의 내적 자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작업을 완수함으로써 프레디의 서울 체류는 의미있는 것이 된다. 그로부터 1년 후, 프레디는 낯선 외국의 여행지에 있다. 허름한 호텔의 로비에서 프레디가 서툴게 연주하는 피아노의 음률은 아름답다. 영화 'Return to Seoul'은 관객을 한국인 입양 여성의 지난한 내적 여정으로 초대한다. 모든 관계에는 고통이 따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관객은 그 생경한 여행 속에 관계와 삶에 대한 응축된 편린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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