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자아와 타자성에 대한 잔혹한 은유, Yeast(2008)

 

  흔들리는 Handheld 화면 속에서 Rachel은 룸메이트 친구 Alice를 다그치는 중이다. 20대 초반의 세 명의 친구 Rachel, Gen, Alice는 주말에 캠핑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밖에서는 젠이 차에서 기다리는데, 엘리스는 레이첼에게 안가겠다고 한사코 버틴다. 화가 난 레이첼은 엘리스를 거칠게 밀치며 짜증을 표출한다. 결국 레이첼은 젠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레이첼. 하지만 레이첼의 주말 캠핑은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한다. 젠은 숲속에서 만난 젊은 남자들을 무례하게 골려주며 즐거워한다. 젠의 가학적인 면모는 갑작스럽게 레이첼의 머리를 가격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레이첼은 젠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만 젠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엉망으로 끝난 캠핑, 집으로 돌아온 레이첼은 엘리스가 데려온 남자가 자신의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엘리스는 뻔뻔하게 굴고, 남자는 나갈 생각이 없다. 레이첼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젠과 엘리스, 과연 그들은 정말로 레이첼의 친구가 맞을까?

  영화 'Yeast(2008)'은 여성 감독 Mary Bronstein의 데뷔작이다. Bronstein은 영화 속에서 레이첼 역을 맡아서 연기도 했다. 영화는 소니 캠코더인 MiniDV로 찍었다. 마치 리얼리티 방송(Reality television)처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Handheld 촬영으로 인물들을 따라간다. 대화는 매우 현실적인 구어체이다. 영화의 서사에는 즉흥성과 자연스러움이 스며들어 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비주류적 독립 영화 제작 스타일이 미국 영화계에 새롭게 부상했다. Mumblecore, 영어 단어 murmur('의미없이 중얼거리다'라는 뜻)에서 기원한 이 장르는 젊은 신예 영화 감독들의 실험 정신을 반영했다. Mary Bronstein도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들이밀었다.

  영화 'Yeast'를 보는 것은 꽤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레이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이 뚜렷하고, 친구들에게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친구, 젠과 엘리스는 레이첼의 기대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져 있다. 타인의 감정을 배려할 줄 모르는 젠은 제멋대로 행동한다. 무직인 엘리스는 게으르고 더럽기 짝이 없다. 엘리스는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 하지 않고 부엌에 탑처럼 쌓아놓는다. 그저 집에서 두더지처럼 머물고 싶어하는 친구 엘리스를 레이첼은 어떻게든 돕고 싶어한다. 하지만 엘리스는 그런 레이첼에게 반응도 하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낸다. 심지어 먹던 콘플레이크 그릇을 레이첼에게 내던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엘리스의 행동은 심리학 전공자들에게 익숙한 용어 '수동적 공격성(Passive-aggressive behavior)'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정말로 궁금해진다. 왜 레이첼은 그런 친구들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을까? 엘리스가 직업을 구해서 레이첼의 집을 떠나자 레이첼은 상심한다. 레이첼은 속상한 마음을 달래고자 젠을 불러낸다. 젠은 레이첼의 머리를 때린 일에 대해 사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젠은 레이첼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는다. 레이첼은 무척 실망한다. 그런 레이첼이 향한 곳은 엘리스가 새로 취직한 6 Flags-미국의 대형 Theme Park 체인-이다. 레이첼은 그곳에서 엘리스가 이상한 마술쇼의 보조로 일하고 있는 것을 본다. 레이첼에게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곳에서 엘리스는 즐겁고 편안하게 보였다. 아마도 엘리스를 보며 레이첼이 느끼는 감정은 한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일 것이다.

  레이첼은 밤의 테마 파크를 하릴없이 헤멘다. 놀이 공원 곳곳에서는 분장한 좀비들과 괴물들이 출몰한다. 사람들의 비명과 웃음소리가 혼재된 그로테스크한 풍경 속에서 레이첼의 고독과 절망감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내린다. 영화의 종반부에 만나는 이 시퀀스에는 지독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젠과 엘리스는 분명 레이첼이 원하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레이첼은 그 친구들과의 관계에 집착하며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레이첼은 그 어긋난 우정에서 무엇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넌 항상 너 자신만을 보고 싶어할 뿐이지."

  레이첼은 고등학교 시절에 찍었던 비디오 테이프를 본다. 거기에는 엘리스와의 즐거운 한 때가 들어있다. 레이첼은 엘리스에게 우정의 추억을 되살리려고 하지만 엘리스는 냉담하게 그렇게 말한다. 레이첼은 우정 속에서 자아를 찾고 있는 젊은 여성을 대변한다. 우정을 잃는다는 것은 레이첼에게 자아의 상실과 고통을 의미한다. 레이첼 역을 연기한 감독 Mary Bronstein은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우정이 영화 'Yeast'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출처: screenslate.com).

  영화는 밤의 테마 파크를 걷는 레이첼의 얼굴을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에 가두면서 끝난다. 레이첼은 친구들과의 우정에서 그토록 원했던 공감과 소통을 얻을 수 없었다. 왜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치는 존재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은 때론 파괴적인 인간 관계도 용인하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 자신은 전적으로 홀로 서있음을 발견한다. 좀비들과 낯선 관람객들 사이에서 레이첼은 그렇게 서있다. 그렇게 영화 'Yeast'는 자아와 타자성에 대한 잔혹한 은유를 보여준다. 



*사진 출처: worldscinema.org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