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자작시: 삐짜(a.k.a. B급)

 

삐짜


오늘 내가 받은 고구마의 택배 운송장에는
'호박고구마 특상 사이즈 비품'이라고 되어있다
비품은 B급, 삐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고구마의 상품페이지에는 전혀 다른 말로
쓰여있다 실속절약형 로얄과, 도대체 이 상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입 고구마는 진짜로 새끼
손가락 크기의 고구마이며, 못난이 고구마는
정말로 지질하게 못생긴 고구마이다 이와는 달리
실속절약형, 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의뭉스러움은
약간 '흠' 있는 상품을 보내드린다는 판매자의 해명으로
해소가 된다 그렇다면 그 뒤에 붙는 로얄과의 뜻은?
그것은 운송장의 '비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무언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온 상품을 뜻하는 삐짜를
척하니 써놓은 판매자의 무신경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자기들 물류센터 알바가 혹시나 로얄과를 포장해서
보낼까봐 그렇게 확실하게 삐짜, 라고 글로 못을 박은
것이리라 그런데 고구마에는 로얄과, 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입, 중, 특상, 대, 특대, 이렇게 대략 5가지
크기로 판매된다 특상이 제일 비싸고, 아주 작거나
큰 것은 싸다 그러니까 내가 주문한 실속절약형 로얄과의
실체적 진실이란 '특상 크기의 삐짜'인 것이다 royal을
지향하지만 그 끄트머리에 닿을 수 없는 실속절약형
비품 고구마의 비애는 이 고구마의 못생긴 자태로도
입증된다 나는 아주 잘 드는 필러로 고구마 껍질을
박박 깎아내고는 모두 다 냉동실에 넣었다 주홍빛이
도는 호박고구마가 맛이라도 로얄이기를 바라면서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