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
흑백 TV 화면에서는 소복(素服)을 입은 여인네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슬픔과 두려움이 TV 화면 너머로
넘실거렸다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어린 나이였던
나에게 그 장면은 기괴한 공포 영화처럼 보였다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뉴스에서 보내준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1979년에 내가 목도했던 그
TV 화면과 다르지 않았다 독재자의 죽음에 통곡하고
실신하며 진심으로 애도를 표했던 이들이 있었다
전두환의 쿠데타, 1987년의 민주화 항쟁, IMF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7년, 그리고 2016년의 박근혜 탄핵까지
나는 나의 시대가 격변으로 뒤엉켜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지켜봐 왔다 그 시대를 지나오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지역과 이념, 패거리 정치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 토대가
흔들리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석열이라는 끔찍한 극우 정치의 혼종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의 안위를 거리낌 없이 내던지고, 오로지 자신의
영속적인 독재를 위해 친위 쿠데타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윤석열과 그 잔당들은 준엄한 법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있었던 이틀 후인 12월 5일,
경북도청 앞에서는 거대한 박정희 동상의 제막식이 있었다
그 동상은 처음 세워진 것이 아니며, 마지막이 될 운명도
아니다 박정희의 동상은 앞으로도 계속 건립될 예정이다
19년을 피 묻은 권력으로 철권 통치한 독재자의 망령은
45년이란 세월을 넘어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새로 세워진 박정희의 동상은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어느 먼 곳을 가리키고 있다 권총처럼 비현실적으로
크게 늘여진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무도(無道)한 권력의
최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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