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
여자는 놀이터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걸어갔다 그리고는
미끄럼틀 앞에 서더니, 거기에 쌓인 눈을 잠깐 들여다 보고는
손가락으로 죽죽 글씨를 써내려 갔다 눈발이 미친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눈이 오는 것을 내다보던 나는 여자가
대체 거기에다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졌다 저런 건 조그만 애들이나
하는 장난 아닌가? 이십 대 후반이나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그렇게 눈 위에 글을 써놓고는 휘적휘적 커다란
보폭의 걸음을 내디디며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슨 글을 썼을까?
나는 어떻게든 나가서 그 글씨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구태여 그 글씨를 보기 위해 따뜻한 집을 떠나는 일은
귀찮기도 했다 어쨌든 있다가 나가 봐야지 곧 눈이 비가 되고, 글씨는
물이 되어 놀이터의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아쉽군 여자가 뭐라고
썼는지 알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무개야, 사랑해! 아니면, 부자 되게
해주세요 같은 것이었을지 아,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워진 글씨, 나는 새삼스럽게 그를 떠올린다
그에게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어떤 말에 대해서, 내 머릿속에서
마구 엉켜 휘날리는 눈발, 나는 곱은 손으로 글씨를 써내려 간다
시간이, 오래되고 아픈 시간이 그 글씨를 지워나가는 것을 본다
그는 나의 글을,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영영 알지 못한다 내 머리가
차디찬 땅에 뉘여질 때 그는 알게 되리라 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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