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은 소련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해였다.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난한다. 스탈린은
1953년에 사망했으나 소련은 그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발언 이후 '해빙기(Khrushchev Thaw)'는
더욱 가속화 된다.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가운데 소련 국민들에게 사회, 문화적으로 폭넓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레오니드 루코프(Leonid Lukov)
감독의 '다른 운명(Разные судьбы, Different Fortunes, 1956)'은 그 해빙기의 초입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는 아름다운 타냐를 중심으로 스툐파, 페쟈, 소냐, 고교 동창생 4명의 젊은 날을 그린다.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네바 강가에서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의 스툐파는 타냐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타냐는 페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스툐파는 실망하지만, 곧 자신의 길을 찾아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로 떠난다. 낮에는 제철
공장, 저녁에는 야간 대학에 다니며 스툐파는 열심히 살아간다. 타냐는 페쟈와 결혼한다. 그러나 학생 신분으로 경제력이 없는
페쟈에게 타냐는 곧 실망한다. 페쟈는 부업으로 택시 운전사 일까지 하지만, 안락한 생활을 꿈꾸는 타냐는 유명 작곡가 슈친과 사귀게
된다. 스툐파가 타냐를 마음에 둔 것을 알지만, 한결같이 스툐파를 좋아하는 소냐는 스툐파가 있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렇게 네 명의 서로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인물은 타냐이다. 타냐를 연기한 타티아나 필레츠카야의 싱그러운 젊음과 아름다움이 스크린 위로
넘실거린다. 아름답지만, 제멋대로이며, 분별력이 결여된 타냐는 사랑에 빠져 급하게 한 결혼에 곧 염증을 느낀다. 가난한 학생인
남편 페쟈는 집 구할 돈도 없다. 각자 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이 이상한 부부의 결혼 생활은 위기에 처한다. 아내가 중년의 부유한
작곡가와 내연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페쟈는 분노한 나머지 타냐의 뺨을 때린다. 이 부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다른 운명'에서 관객들은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행해지던 '자아비판'의 실제이다. 남편에게 뺨을 맞은
타냐는 학교의 공산당 위원회에 페쟈를 고발한다. 단상에는 사회를 맡은 당 소속 간부들이 자리하고, 청중들은 타냐와 페쟈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던진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문제는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다. 타냐는 자신을 때린 페쟈를
비난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료 학생들은 페쟈가 왜 타냐를 때렸는지 궁금해 한다. 페쟈는 아내의 허물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타냐는 슈친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 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비판은 타냐에 대한 공개적 비난으로 돌아온다.
개인의 삶에 당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실체적 면모는 스툐파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스툐파는 자신의 전공
지식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제안하지만, 공장의 직속 상사들은 스툐파가 당돌하며 분수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한다.
스툐파의 제안은 무시되고, 업무에서 배척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그런 스툐파를 구하는 것은 지역의 당 간부이다. 그는 스툐파가
가진 전문성과 참신성을 높게 평가하고, 스툐파는 곧 당의 인정을 받아 레닌그라드 연구소 강연을 맡게 된다. 열심히 삶을 개척해
나가는 스툐파에게 주어지는 행운, 도덕적으로 타락한 타냐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비난, 이렇듯 '다른 운명'에서 국가는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공산주의 이념에 맞는 바람직한 인민의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의 원칙은
영화 '다른 운명'에서도 충실하게 재현된다. 그것은 서로 대립되는 성향을 가진 타냐와 소냐의 엇갈리는 운명으로 입증된다. 타냐의
엄마는 딸에게 넘치는 사랑을 퍼붓는다. 결혼을 했음에도 엄마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는 타냐는 오직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와는 달리 한결같은 사랑으로 스툐파를 바라보는 소냐는 시베리아의 낯선 도시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며, 결국
원하는 사랑을 쟁취한다. 스툐파는 페쟈를 통해 알게 된 타냐의 불륜에 실망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소냐가 가진 지조와 성실함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성장하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타냐가 아닌 소냐였다. 타냐에게 매혹되었던
남자들은 모두 타냐를 떠난다.
아름다움으로 빛나지만, 지극히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타냐는 영화의 마지막에 기차역에 홀로 서 있다. 타냐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캐릭터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타냐가 지닌 무분별함,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타냐는 1950년대의 소련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었을 뿐이다. 타냐는 화면을 향해 관객을
응시하면서 묻는다.
"나는 좋은 사람(good person)이 아닌가?"
러시아의 관객들이 타냐의 물음에 연민과 공감을 갖고 바라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가가 강제한 바람직한 도덕 규범,
가치에서 벗어난 여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까지, 스크린 밖의 타냐는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레오니드 루코프
감독이 그려낸 '다른 운명'에는 그렇게 사회주의 국가에서 순탄치 못했던 삶을 살아간 여인의 초상이 담겨져 있다.
*사진 출처: zen.yandex.ru 타냐 역의 타티아나 필레츠카야
** 어울리지 않는 불행한 부부 타냐와 페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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