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문예영화 속에 반영된 일본 사회의 변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猫と庄造と二人のをんな, 1956)

 

  이 영화, 고양이 사랑하는 이들이 보면 꽤나 속상할 영화이다. '리리(リリ, Lily)'라는 이름의 고양이는 영화 속 여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내동댕이 처진다. 여자들이 그러는 이유는 자신들 보다 리리가 남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유일한 삶의 낙이며, 애정의 대상인 고양이 리리의 주인은 리리에게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는다. 지독한 마마보이인 주인공 쇼조. 그는 아내 시나코가 소박맞고 쫓겨나는데도 해변가에서 고양이와 놀고 있다. 쇼조의 엄마 오린은 지참금이 적다며 며느리를 내보내고, 부자 오빠의 딸 후쿠코를 아들과 맺어주려고 한다. 푼돈벌이 잡화점으로는 먹고 살기 힘든데다, 살고 있는 집도 오빠에게 저당잡혀 있다. 오린은 어떻게든 조카 후쿠코를 구슬려서 집도 지키고 지참금도 뜯어낼 참이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후쿠코는 오린의 속셈대로 되지 않는다. 시나코는 후쿠코에게 진정으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거든 고양이 리리를 자신에게 보내라고 말한다. 과연 쇼조는 리리를 보낼 수 있을까?

  도요타 시로 감독의 1956년작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2017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나왔다). 1936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고양이 리리와 주인인 쇼조, 그의 두 여자 사이의 애증을 그려낸다. 이 얽히고 설킨 사각 관계의 파열음이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20분을 채운다. 생각보다 영화는 지루하지 않다. 여자들에게 눌려서 자신의 뜻대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쇼조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딱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드센 여자들이 나오는 일본 영화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소박맞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옷을 쥐어뜯고, 전처와 후처는 거센 드잡이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세 명의 여자들은 쇼조의 남성성을 거세시킨 주역들이다.

  아마도 영화 속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후쿠코 역을 연기한 카가와 교코일 것이다. 제멋대로 자란데다 파티걸로 복잡한 남성 편력을 지닌 후쿠코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돈의 위세를 믿고 시어머니 오린을 종부리듯이 부려먹으며, 고양이 리리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남편의 꼴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리리를 전처 시나코에게 보내라는 후쿠코의 뜻에 따르는 쇼조의 모습은 애잔하다. 나루세 미키오의 '안즈코(杏っ子, 1958)'에서 착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남편의 패악질을 견뎌야 했던 카가와 교코를 떠올리면, 이 영화의 후쿠코는 그 반대편에 자리한 캐릭터이다.

  아들을 마마보이로 키운 오린은 또 어떠한가? 며느리를 자신의 맘대로 갈아치우며, 지참금에만 눈이 먼 이 속물적인 시어머니는 돈 있는 후쿠코에게 벌벌 떤다. 옷장에다 잔뜩 처박아 놓은 후쿠코의 속옷 빨랫감을 군말없이 세탁하면서, 어떻게든 며느리가 친정에서 돈을 가져오길 바란다. 아들을 머저리 취급하는 이 엄마는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도 나누지 않는다. 맛있는 수박도 아들 주지 않고 혼자만 먹고, 가게에서 번 돈은 아들 몰래 꿍쳐둔다. 그러니 아들은 마음 둘 데라고는 고양이 리리뿐이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 보이는 바깥의 풍경들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갈등과는 관계없이 여유롭고 평화롭다. 쇼조와 후쿠코가 시간을 보내는 여름 해변가의 풍경은 떠들썩한 활기가 넘친다. 댄스 파티와 음악, 멋진 양장을 한 젊은 여성들의 모습들에서는 전쟁의 그림자나 상흔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전후 피폐한 경제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키는 엄청난 호황기에 접어든다. 후쿠코가 보여주는 새로운 여성성은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1936년에 쓰여진 소설을 영화가 시대에 맞게 아주 잘 각색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요타 시로는 소설을 영화로 만든 문예 영화에 일가견을 보여준 감독이었다. 이 영화는 그가 만든 문예 영화의 수작으로 손꼽힌다.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만든 데에는 간사이 사투리도 한 몫을 했다. 카가와 교코를 비롯해 시나코 역의 야마다 이스즈, 쇼조 역의 모리시게 히사야는 간사이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한다. 그들 모두 간사이 지방 출신이었다(교코는 이바라키 현, 다른 두 명의 배우는 오사카 출신이다). 남자 하나 두고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거칠게 싸우는 여자들의 혈투가 있음에도 영화는 긴장감 속에 유머를 잃지 않는다. 엄마와 두 명의 여자들에 의해 남성성을 박탈당한 채 순응하며 사는 쇼조의 캐릭터는 전후 일본 사회의 새로운 방향성으로 읽히기도 한다. 군국주의 시대의 극한의 남성성은 변화된 시대에 맞추어 달라져야만 했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서 관객들은 고도성장기를 맞이하며 변화된 일본의 내적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tiff-jp.net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아, 홍상수: 물안에서(In Water, 2023)

    오래전, 영화를 공부할 때의 일이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신경을 긁는듯한 소음이 계속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영상원 본관 3층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침내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냈다. 열린 교수 연구실 안쪽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한 남자가 이상한 악기를 천천히 두드리고 있었다. 홍상수였다. 그는 매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기를 두들기던 그가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약간 당황했는지,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동남아시아인지, 아프리카인지 원산지를 알 수 없는 악기 소리는 내가 다시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해 가을, 홍상수가 영상원 교수직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홍상수의 강의는 영화과 학생들에게 악명이 자자했다. 거의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상원을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교수직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형편없이 어그러졌다. 나는 홍상수의 그 지치고 지루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는 결국 떠날만한 때에 떠났다. 그건 학생들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어제, 홍상수의 2023년 작 영화 '물안에서'를 보았다. 러닝타임 61분의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이 초점이 나간 상태(ouf of focus)로 흐릿하게 나온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화면이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로 나오니, 관객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등장인물은 세 명. 배우로 활동하던 승모는 자신의 단편 영화를 찍겠다며 섬에 왔다. 승모와 동행한 사람은 촬영을 맡은 친구 상국, 연기를 할 여배우 남희이다. 승모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모은 돈 300만 원을 들고 왔다. 그런데 정작 그는 시나리오조차 쓰지 않았다. 상국과 남희는 승모가 찍을 영화가 어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