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그 남자의 괴로운 가을, 가을 마라톤(Осенний марафон, Autumn Marathon, 1979)

 

  남자의 아내는 결혼한 딸에게 줄 커튼을 샀다. 그러나 딸은 마음에 안든다며 가져가지 않았다. 아내는 자신이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며 운다. 딱한 마음이 든 남자는 딸이 왔을 때, 그냥 가져가지 왜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냐고 말한다. 딸은 아빠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빠나 엄마한테 잘하세요."

  딸의 핀잔을 듣고 남자는 머쓱해진다. 이 남자,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의 속이 문드러지는 데에는 그가 상당부분 일조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1979년 영화 '가을 마라톤(Autumn Marathon)'은 중년 남자의 가을앓이를 그려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을 풍경과 함께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남자의 내면 풍경이 펼쳐진다.

  실력있는 번역가이며 대학 교수인 안드레이는 자신의 원고를 정리해 주는 젊은 타이피스트 알라와 눈이 맞았다. 알라는 안드레이가 가정을 포기하고 자신에게 와주길 바라지만, 안드레이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아내에게 충실하지도 않으면서 두 여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 남자는 시간이 갈수록 거짓말 실력만 늘어난다. 그의 아내 니나는 남편에게 딴 여자가 있는 것은 알지만, 그저 속만 끓이면서 지켜보는 중이다. 이 마음 약한 남자는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알라와 함께 있을 때는 알라의 뜻을 받아주고, 집에 돌아와서는 갱년기 우울증을 겪는 힘든 아내를 안쓰러워 한다. 안드레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알렉산드르 볼로딘이 붙인 원래의 제목은 '도둑의 괴로운 생활'이었다. 도무지 영화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제목은 영화를 만들면서 바뀌었다. 중년이란 나이가 '가을'이라는 계절과 어울리기도 하고, 마침 영화를 찍었던 시기가 그렇기도 했다. '마라톤'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안드레이는 덴마크 교환 교수 빌의 도스토옙스키 번역을 도와주고 있는데, 빌은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안드레이는 좋아하지도 않는 달리기를 빌의 뜻에 맞춰주느라 매일마다 뛴다. 이 남자는 도무지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없다. 그의 옆집에 살고 있는 바실리가 보드카 사들고 들어와서 빌과 자신에게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는데도 거절하지 못한다. 바실리가 근처 숲에 버섯을 따러 가자고 하자 억지로 따라나선다.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안드레이의 일상은 뭔가 계속 엉키기만 한다.

  이 사람 좋은 안드레이는 번역 실력이 좋지 않은 동료 바르바라가 일감도 얻지 못한 것을 마음에 걸려한다. 대신 번역일을 도와주다가, 급기야 자신에게 맡겨진 번역일을 바르바라에게 빼앗겨 버린다. 그 와중에 갑자기 먼곳으로 직장을 옮기게 된 딸과 사위 때문에 니나는 상심이 크다. 아내 곁에 머무르기로 마음 먹지만, 아내는 안드레이의 우유부단함과 거짓말에 진력을 내고 별거를 통보한다. 알라도 그를 떠난다. 안드레이는 갑자기 각성한다. 그는 사이가 좋지 않은 동료 교수와 큰소리로 싸우고, 좋지 않은 수업 태도를 보인 학생들에게도 똑바로 수업 들으라고 말한다. 그저 사람 좋은,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이 남자는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아내와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편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국영 영화사 Mosfilm이 지향하는 건전한 인민의 사고방식에 그다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제작 담당자는 시나리오를 쓴 볼로딘에게 대놓고 본인 이야기냐고 물었고,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다넬리야 감독은 제작사에서 결말에 대한 수정을 요구할까봐 걱정을 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확실하게 돌아가는 결말이 아니라는 데에 당시의 많은 소련 여성 관객들은 분노했다. 1979년에 소련에서 만든, 중년의 위기에 처한 남자의 서글픈 코미디 영화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안드레이는 매일 아침 늘 그랬듯이 빌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빌을 따라 내키지 않는 새벽 조깅에 나선다. 어스름한 새벽녘, 스산한 가을 풍경 속에 힘겹게 달리는 안드레이의 뒷모습은 애잔하게 보인다. 중년의 나이에 무언가를 바꾸는 일은 그토록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살아왔던 삶의 방식, 인간 관계, 내적 심성, 그 모든 틀을 깨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에는 늦은 걸까? '가을 마라톤'에는 오랜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괴로운 중년 남자의 초상이 레닌그라드의 가을 풍경 속에 담겨져 있다.  


*사진 출처: pikabu.ru  안드레이 역의 배우 올레그 바실라시빌시. 그는 이 영화의 연기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