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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 무사도 잔혹이야기(武士道残酷物語, Bushido: The Cruel Code of the Samurai, 1963)

 

  미국의 매카시즘은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보다 앞서 공산주의자 색출 운동이 시작된 나라가 있었다. 종전 후 미 군정이 들어선 일본에서였다. 영화계에도 거센 사상 인증 광풍이 몰아쳤다. 당시 도호 소속 감독이었던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영화사에서 나와야만 했다. 먹고 살 방도가 막막해진 영화 감독은 고철 수집상이 된다. 그런데 자신이 모은 고철이 한국 전쟁에 쓰이는 군수 물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물상 일을 때려친다. 골수 좌파 지식인이었던 그에게 전쟁은 범죄 행위였다. 그는 독립 영화사를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신념이 깔려 있다. 바로 이마이 타다시 감독이다. 그가 1963년에 만든 영화 '무사도 잔혹이야기(Bushido: The Cruel Code of the Samurai)'에도 그런 그의 확고한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영화는 도쿠가와 막부 형성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7대에 이르는 무사 가문의 잔혹사를 담았다. 영화의 제목에서 '잔혹(殘酷)'이라는 말을 대체할 단어는 없다. 지배 계급에 대한 피지배 계급의 굴종과 피학의 역사. 영화의 원작은 난조 노리오의 소설 '피학(被虐)의 계보'이다. 작가 난조 노리오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경제학과 교수로 당대의 엘리트였다.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설로 시대와 인간에 대한 탐구를 했던 작가였다. 어떤 면에서 이마이 타다시가 난조 노리오의 소설을 택한 것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원작이 가진 통렬한 사회 비판의 메시지는 영화를 통해 완벽히 구현된다.

  일본의 전국 시대, 낭인자객의 삶을 살던 이쿠라는 사무라이로 받아준 영주 집안에 충성을 맹세한다. 그것이 이쿠라 가문의 시작이었다. 영주의 잘못을 덮기 위해 할복으로 삶을 마감했던 그의 비극은 7대에 이르는 후손까지 이어진다. 죽은 영주에게 충성을 바친다며 할복하는 2대, 남색을 밝히는 영주의 시동(侍童)이 되었던 3대, 아내와 딸을 영주에게 바쳐야 했던 4대, 정신병을 앓는 영주 뒤치닥꺼리하는 메이지 시대의 5대, 가미카제로 허무하게 죽은 6대, 그리고 현대의 삶을 사는 7대로 이어진다. 7대에 이르는 이쿠라 가문의 사무라이를 연기한 나카무라 킨노스케의 열연이 돋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괴로움과 먹먹함 없이 보기는 어렵다. 왜 그들은 '무사도'를 맹신하며 자신과 가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광신의 모습에 가깝다. 딸을 대영주의 노리개로 보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까지 겁탈하려는 영주에게 4대 이쿠라는 그 어떤 반항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할복의 명도 기꺼이 받는다. 죽기 전에 아들에게 사무라이의 본분은 충성임을 가르치고, 어린 아들은 그것을 열심히 외운다. 이쯤되면 무사도는 신념이 아니라 저주 같다.

  개화기 메이지 시대에도 그 저주는 이어진다. 가문에서 내쳐진 미친 영주를 돌보게 된 5대 이쿠라는 사법 시험을 앞두고 있다. 영주 수발을 하느라 사법 시험은 떨어지고, 심지어 자신을 대신해 돌보던 약혼녀가 겁탈을 당했는데도 영주를 보살핀다. 이 사무라이 집안에는 굴종의 유전자가 뼛속 깊이 새겨져 대물림되는 것인가? 한탄이 절로 나온다. 막부는 끝났지만 이쿠라 가문의 수난은 이어진다.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가 주군의 위치를 대신한다. 양복을 입은 현대의 이쿠라에게는 '회사'가 새로운 주군이다. 상사는 이쿠라에게 경쟁 회사에 근무하는 약혼녀를 이용해 입찰 정보를 빼오도록 압력을 넣는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려는 이쿠라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복잡한 도시의 도로를 한 무리의 회사원들이 걸어간다. 이마이 타다시는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묻는 것 같다. 과연 피지배 계급의 맹목적 충성과 자발적 굴종의 역사가 끝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샐러리맨들에게 그 장면은 매우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회사의 노예가 아니며, 오너는 모셔야할 주군이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그런 눈에 보이는 외적 객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무사도 잔혹이야기'는 신념의 차원, 더 나아가 무의식까지도 지배하는 계급 의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요구한다.

  흑백 필름 속에 펼쳐진 이쿠라 가문의 잔혹극 속에 빛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마이 타다시는 어둡고 황량한 배경 속에 그들을 가두고 피학의 비극을 그려낸다. 이쿠라 가문의 사무라이들은 오직 주군을 위해 칼을 휘두른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가족의 목숨까지 앗아간다. 그럼에도 버릴 수 없었던 신념은 '무사도'란 이름의 괴물이었다. 일본의 역사를 관통하는 계급의 문제, 그 무섭도록 견고한 착취와 학대의 역사를 '무사도 잔혹이야기'는 처절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그 잔혹사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또한 그것이 이쿠라 가문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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