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밤의 충돌(Clash by Night, 1952)'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거친 바다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갈매기와 물개가 조업 중인 선박들 주변에 모여든다. 대형 그물에서 쏟아지는 생선들은
통조림 공장으로 이동한다. 여성 노동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생선을 자동화 라인에서 분류한다. 마치 수산물 가공업에 대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도입부를 가진 영화, 프리츠 랑 감독의 1952년작 '밤의 충돌(Clash by Night)'이다. 원작은 클로드
오데츠가 1941년에 발표한 동명의 희곡으로 브로드웨이 연극으로도 공연된 작품이었다.
한가로운 몬테레이의 어촌 마을에 화려한 외모의 여성이 도착한다. 매(Mae)는 고향을 떠난지 10년 만에 돌아왔다. 높은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가는 여자는 영 그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는 남동생 조의 집을 찾아간다. 조는
누나가 보낸 그간의 삶을 궁금해 한다. 매는 '꿈은 컸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었지'라는 말로 대신한다. 매와 알고 지냈던 마을의
순박한 어부 제리(폴 더글라스 분)는 매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동네 영화관의 영사 기사 얼(로버트 라이언 분)도 매를 좋아하게
되지만, 매는 얼의 불안하고 상스러운 면모를 경멸한다. 어떻게든 삶에 안착하고 싶었던 매는 제리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는 딸도
태어난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답답함에 지친 매는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끼는데...
'밤의 충돌'은 프리츠 랑 감독의 후기작으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작품이다. 당시에도 이 영화는 작품성 보다 다른 의미로 큰
화제가 되었다. 영화에서 조의 여자 친구로 나온 마릴린 먼로 때문이었다. 먼로는 누드로 찍은 화보 달력을 내놓았는데, 먼로를
취재하려고 촬영장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제작사 RKO는 몰려든 기자들을 내쫓는 것이 일이었고, 촬영장의 분위기도 어수선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먼로는 감독의 연출 지시는 무시하고 자신의 개인 연기 교사의 지시를 따랐으므로 프리츠 랑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주연 배우 바바라 스탠윅을 비롯해 폴 더글라스, 로버트 라이언은 집중력을 발휘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바바라 스탠윅 최고의 연기력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평범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야심많은 여자의 고통과 좌절을 보여준다. 주부의 일상을 견디는 것이 매에게는 갈수록 힘들게
느껴진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과 비슷한 기질을 가진 얼에게 끌리고, 매는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한다. 프리츠 랑이 보여주는 이
멜로 드라마는 매우 현실적이며 절제되어 있다. 동시대의 감독 더글라스 서크가 화려함이 넘쳐나는 세트에 갇힌 중산층 여자의 멜로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바바라 스탠윅은 어부 아내의 일상을 연기한다. 빨래를 널고, 식사를 준비하고, 아기를
돌본다. 프리츠 랑은 어촌 마을의 선술집, 결혼 파티, 해수욕장을 보여줌으로써 일상적 풍경이 가진 사실성을 강조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프리츠 랑은 일반적 멜로 드라마 서사의 전복을 시도한다. '밤의 충돌'에서 매의 성격적 결함과 타락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은 남편 제리이다. 그는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가장이며, 아내에게 충실한 사람이다. 나쁜 남자에 의해 슬픔과 고통
속에 빠지는 멜로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과 바바라 스탠윅이 연기하는 매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다. 제리는 아내의 부정(不貞)에
분노해, 그 상대방인 얼을 죽이려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 가엾은 남자를 보면서 감정적으로 동요할 관객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 멜로 드라마의 여성 관객들을 소구(訴求)하지 않는다. 멜로 드라마를 향유하는 주 관객층이 여성임을 상기한다면 의외의 점이다.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가 상영되는 당시 영화관 매표소는 여성 관객들로 미어터졌다.
자신을 떠나게 해달라는 매의 간청에 제리는 외친다. '당신은 끔찍한(rotten) 여자야!' 그 여자, 매의 얼굴에서
'이중배상(Double Indemnity, 1944)'의 요부 필리스가 얼핏 스쳐지나가는 것도 같다.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살인을
부추기는 악녀 필리스를 연기한 사람은 바바라 스탠윅이었다. 분명 '밤의 충돌'의 매는 나쁜 여자이지만, 엄마 역할까지 포기하지는
않는다. 매는 딸을 자신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일이다. 가정을 버리려는 여자가 불륜남과 함께 떠나면서 자식을
데려간다는 것은. 결국 모성이 매를 잡아끈다. 제리는 아내를 용서하고, 여자는 다시 가정에 안착한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스탠윅이
연기한 또 다른 영화 '스텔라 달라스(Stella Dallas, 1937)'의 헌신적인 엄마 스텔라를 떠올리게 된다.
왜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여자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가? 영화가 만들어진 1952년에 미국은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한국 전쟁을, 안으로는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 사회는 이전에 비해 매우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2차 대전 중에 이루어진 여성의 사회 진출은 종전과 함께 다시 축소되었고, 여성들은 가정으로 복귀했다. 가정과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 가치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굳건해져 갔다. 매카시즘은 공식적으로 1954년에 종결되었지만, 그 여진은
195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의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그것이 미친 영향력을 분리해서 보는 일은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영화의 제목은 19세기 영국 시인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의 시 '도버 해변(Dover Beach)'에서
따왔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의 해변가에 서있는듯 하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폭풍우 속을
걸어간다. 관객들은 '밤의 충돌'에서 바바라 스탠윅의 치열한 연기와 함께 프리츠 랑이 보여주는 전복적 멜로의 서사를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milibrary.com 배우 바바라 스탠윅과 로버트 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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