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앳된 얼굴의 소녀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15살 와카에는 주정뱅이 아빠와 계모가
있는 집이 싫다. 밀린 공납금을 내라는 채근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여인숙을 하며 뚜쟁이 노릇을 하는 고모는
와카에를 일꾼으로 부려먹으며 게이샤로 만들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와카에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착한 동네 오빠
사부로다. 21살의 사부로는 도쿄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때려치우고 고향 호쿠리쿠로 돌아왔다. 와카에의 딱한 상황에 연민을 갖게
된 사부로는 학업을 이어가라며 공납금도 보태주고 공부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직업도 없고 불안정한 처지의 사부로도
마음이 힘들기는 마찬가지. 와카에와 사부로는 각자의 삶의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우라야마 키리오(浦山桐郎) 감독의 1963년작 '비행소녀(非行少女)'는 2개의 영어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일본 사이트에서는
'Each Day I Cry'로 병기하고 있고, 해외 사이트에서는 'Bad Girl'로 검색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Bad
Girl'의 영어 제목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와카에(이즈미 마사코 분)를 '비행소녀'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 그 슬픔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와카에의 현실은 비참하기만 하다. 술꾼 아버지는 돈이나
벌어오라며 내몰고, 뚜쟁이 고모와 마을 야쿠자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와카에를 이용해 먹을 궁리만 할 뿐이다. 음주와 흡연,
상습적인 도벽을 가지고 있는 와카에의 모습은 불행한 환경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엇나가는 소녀에 가깝다.
사부로(하마다 미츠오 분)는 와카에를 올바른 길로 이끄려고 애를 쓰지만, 사부로의 처지도 괴롭다. 참의회 의원으로 입후보해서
한창 선거운동 중인 형은 사부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형에게 게으르고 쓸모없는 놈으로 취급받지만, 사부로에게도 형은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존재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일으켰던 시위에서 그의 형은 방관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정치인으로 나서려고 하는 모양새가 영 마뜩잖다. 이 영화에서 기록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오는 그 시위는 1952년에 일어났던
'우치나다 투쟁(内灘闘争)'이다. 한국 전쟁으로 포탄 수요가 늘어나자 미군은 해안 사구가 있는 우치나다에 포탄 사격 시험장을
만든다. 그에 반대한 마을 주민들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철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우치나다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일본
내의 시민, 정치 단체들이 집결한 총력적인 투쟁이었다. 결국 미군은 사격 시험장을 철거했다. 일본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미군
기지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거둔 성과였다.
영화 속에서 '우치나다 투쟁'이 비록 삽화적 기억으로 언급된 사건이기는 해도, 감독 우라야마 키리오는 풋풋한 사랑 이야기 속에
일본 사회의 내면을 투영시킨다. 영화는 사부로가 집에 들어오면 보게 되는 형의 선거운동을 여러 장면으로 넣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과 술 접대를 하며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는 형은 결국 참의원에 당선된다. 실제로 1953년에 우치나다의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미군 기지 철거를 외친 후보가 아니라 백화점을 소유한 돈 많은 지역 유지였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외세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본 사회가 내부적으로는 끈끈한 가족주의의의 그림자에 매여 있음을 입증한다. 기회주의자로 묘사된 사부로의 형은 당시의 기성
세대를 대변한다. 그들은 전후 혼란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부로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 변혁의 이상을 설파하기 보다는, 사회로의
빠른 정착과 체제 순응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사부로의 형은 사부로에서 실제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라고 야단친다. 사부로는
형에게 반발해서 집을 뛰쳐나가도 봤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술집의 웨이터였을 뿐이다. 결국 사부로는 동네 양계장의
관리인으로 취직한다.
와카에는 사부로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부로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안다. 돈을 벌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와카에와 결별을 택하지만, 와카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와카에가 실수로 양계장에 일으킨 방화는 두 사람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와카에는 교화원으로, 사부로는 기술 직업 학교로 간다. 재봉일을 배우며 진정한 자립과 갱생을 위해 노력하던 와카에는
오사카의 일자리를 소개받고 떠나려 한다. 그런 와카에를 사부로가 붙잡는다. 와카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의 원작은 모리야마 케이가 쓴 소설 '사부로와 와카에', 부제는 '푸른 구두(青い靴)'이다. 영화 초반부에 와카에는 술집
여종업원의 하이힐 구두를 훔친다. 멋진 구두를 신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던 와카에는 오사카로 떠나는 길에 그 구두를 강물에
내던진다. 괴롭고 힘든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와카에를 태운 오사카행 기차는 끝없이 이어지는 선로를 달린다.
비행소녀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향하는 그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와 슬픔을 딛고 용기있게
일어서는 와카에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것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일어서는 것이며, 결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그 모든 것과 직면함을 의미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매일 울었던 와카에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우라야마 키리오는 15살 소녀의 재생을 위한 고통스러운 마음의 여정을 '비행 소녀'에 담아냈다. 관객은 그 여정
속에서 전후 혼란기의 상처를 봉합하고 현실에 매진하는 일본 사회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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