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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민초들의 대서사, 토지(KBS TV 드라마, 1987-1989)

 

  나이가 들수록 오래전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KTV(국민방송)에서 요새 방영해주고 있는 드라마 '토지(1987)'를 다시 보고 있다. 햇수로 무려 34년 전의 드라마이다. 어제는 최 참판 댁의 재산을 노린 김평산의 음모에 동참한 참판 댁 하녀 귀녀의 비참한 말로, 귀녀의 아들을 거두는 강 포수 이야기가 나왔다. 어찌나 조연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지 이미 다 본 것을 또 보게 된다. 많은 등장 인물이 나오는 대하 드라마의 경우,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받쳐주는 조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야말로 극을 이끌어 가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토지'는 당시 KBS의 드라마 제작 역량이 총집결된 작품으로, 박경리 원작의 치밀한 서사와 당대의 대표적 TV 출연 배우들의 열연이 빛난다.

  '토지'는 하동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구한말에서 광복 전까지 만석꾼 최 참판 댁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소설이 완간된 것은 1994년이어서, 이 드라마는 당시까지 출간된 부분까지만 다루었다. KBS에서는 주인공 '최서희' 역의 최수지를 드라마의 간판으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최수지의 사진이 인쇄된 KBS 엽서를 홍보물로 받았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신인 배우로 연기력이 미흡하다는 평이 있기는 했었지만, 최수지가 보여주는 서희의 이미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최수지를 비롯해 이 드라마는 신인 배우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서희의 아역으로 나왔던 이재은과 안연홍은 이 드라마의 출연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서희의 몸종 봉순이의 소녀 시절을 연기했던 전미선의 고왔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희와 길상의 큰아들 환국 역으로는 김민종이 나왔다. 그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토지'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김평산의 사악한 계략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서희는 할머니마저 돌림병으로 잃은 후, 일가붙이인 조준구에게 재산을 강탈당한다. 할머니가 숨겨놓은 금괴를 가지고 연변의 용정에 자리를 잡은 서희는 조준구에게 복수할 계획을 진행시켜 나간다. 한편 조선의 국운은 기울어 일본의 압제에 놓이게 되고, 조준구는 친일파가 되어 하동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송노인을 내세워 광산 투자를 미끼로 조준구를 망하게 만든 서희는 평사리의 집과 땅을 되찾고 마침내 귀국한다. 종의 신분으로 서희의 남편이 된 길상은 독립 운동에 투신하고, 서희의 두 아들도 시대의 격변 속에 어려움을 겪는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서희는 길상의 빈자리,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을 보며 인생의 회한을 느낀다. 일제의 폭정이 심해지는 가운데,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가지만 그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혈연주의이다. 평사리 만석꾼 최 참판 댁의 가계(家系)는 최치수의 딸 서희에게 이어진다. 최치수가 비명횡사한 이유는 집안의 종손 자리를 넘 본 김평산 일당의 계략 때문이었다. 조상 제사를 모시는 아들에게 가문의 모든 재산이 상속되는 유교적 전통에서 딸 서희가 가진 지위는 무의미하다. 할머니의 일가붙이 조준구가 최씨 집안의 재산을 강탈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서희는 아들들에게 남편의 성씨인 김씨 대신 최씨를 부여함으로써 단절될 위기의 가문을 복원시킨다.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것은 성씨뿐만이 아니다. 박경리가 그려내는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외모와 기질, 성격에 더해 부모의 인생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사악한 김평산의 아들 김거복은 일제 시대의 밀정이 되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을 보여준다. 김평산과 대비되는 그의 착한 처 함안댁은 남편의 악행에 절망해 자살하는데, 함안댁의 성품을 닮은 거복의 동생 한복은 길상의 독립 운동을 돕는다. 강직한 용이가 후처 임이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홍이는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는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삶까지도 빼닯는데, 무당 월선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 했던 용이의 젊은 날처럼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대체적으로 '토지'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자식들은 부모의 태생을 따라간다. 동학당의 우두머리 김개주와 서희의 할머니 조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환의 일생은 체제 저항적인 삶이었다. 그것은 결코 교육이나 주변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경리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철저히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갇혀 있다.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며 그저 살아갈 따름인 인물들에게 출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여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죽음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김평산의 처 함안댁의 자살 말고도 '토지'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서희의 몸종에서 기생이 되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봉순은 결국 딸을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 김환은 자신이 몸담은 동학 잔당 내의 분란 때문에 체포되는데, 동료를 밀고할 위기에서 조직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박경리가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의 '자살'이라는 삶의 종결 방식은 다소 미화되어 있으며, 윤리적인 결단에 의한 측면이 강하다.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죽음, 그것도 순탄치 못한 여러 죽음의 방식으로 재현된다. '토지'에서 타고난 자신의 명줄대로 살아가는 인물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타고난 운명대로 변혁의 시대와 맞서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토지'는 무려 2년에 걸쳐서 방영된 대장정의 드라마였다. 그런 엄청난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된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가진 장점이었고 의무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빛나게 만들었던 것은 주 조연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였다. 김평산 역의 이치우, 그 아들 김거복 역의 백인철이 보여준 사악하기 짝이 없는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2004년에 SBS에서 리메이크로 방영된 '토지'에서 김거복 역은 유해진이 맡았는데, 그의 연기도 백인철의 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악랄한 조준구 역의 연규진과 조준구의 처 홍씨로 나온 김성녀의 연기는 또 어떠한가? 어떤 면에서 연규진의 배우 경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 연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용이 역으로 나왔던 임동진, 강청댁 역의 연운경, 월선 역의 선우은숙, 임이네로 나온 박원숙의 연기도 명불허전이다.

  토속적이고 장중한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소가 쟁기질을 하는 '토지'의 인트로 화면을 잊는다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덧 34년의 세월이 흘렀고, 좋지 않은 화질의 드라마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감동과 재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이런 대하 사극을 만드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드라마는 외주 제작의 형식으로 바뀌었고,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간접 광고들로 범벅이 된 드라마들이 쏟아질 뿐이다. 사극 장르 조차도 판타지 사극으로 생존하는 마당에 '토지'같은 대하 드라마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희망사항으로만 남을뿐이다. 공채 시스템 하에서 기용할 수 있었던 실력있는 조연 배우들의 인력 풀도 무너진 지 오래다. 오래전 사극 속의 중견 배우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은 '인생 다큐 마이웨이'에서 인데, 은퇴한 그들은 시골의 전원 주택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KTV에서는 평일 저녁 10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토지'를 방영하고 있다. 박경리 작가의 필생의 업적 '토지'를 드라마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혼란의 구한말과 엄혹한 압제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 그리고 흘러간 시대의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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