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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가족 서사, 생선 쿠스쿠스(La graine et le mulet, The Secret of the Grain, 2007)

 

  영화는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는 슬리만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순의 나이로 평생 동안 배와 함께 일해온 슬리만은 구조조정으로 퇴직의 압력을 받는다. 그는 받은 퇴직금에 대출받은 돈을 더해 폐선을 개조한 식당을 열려고 한다. 튀니지 이민자 출신인 그가 식당 메뉴로 생각한 음식은 '생선 쿠스쿠스'. 그의 전처 수아드는 그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혼하고 작은 호텔 여주인 라티파, 의붓딸 림과 같이 살고 있는 그에게 전처와 자식들은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슬리만은 본격적인 식당 개업을 앞두고 시의 관계자와 여러 초대 손님들에게 음식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한다. 어쨌든 하나로 뭉친 가족은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는데, 주요리인 쿠스쿠스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 가족 식당의 첫 시식은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튀니지에서 출생한, 이민자 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케시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 대부분을 튀니지 이민자 출신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무엇보다 쿠스쿠스라는 요리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튀니지와 모로코 등지에서 즐겨먹는 요리다. 타진(Tajine)이라는 고깔 모자 뚜껑의 그릇에 담아서 내놓는 이 요리는 고기와 야채, 가는 밀가루를 쪄서 만든다. 슬리만의 전처 수아드는 자신이 만든 생선 쿠스쿠스로 자식들 내외를 불러모아 대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나누는 잡다한 대화들은 가족애와 생의 활력으로 넘친다. 길게 이어지는 대화 장면을 케시시는 이민자 가정의 끈끈한 인간적 유대로 포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좀 과하다. 이 가족의 대화는 별다른 주제도 없고, 그저 시시한 잡담들을 이어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러닝타임 2시간 30분 속에는 그 지루하고 긴 대화 장면도 한몫을 한다.

  그렇다고 이 가족이 진정으로 화목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혼한 전처와 자식들은 35년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슬리만을 그다지 존중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지내는 슬리만을 곱게 보기만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식들이 슬리만의 퇴직금을 운운하는 것은 이 가족에게 가장의 존재란 돈 벌어다 주는 기계였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슬리만은 억센 친자식들 보다 의붓딸 림을 더 의지하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낀다. 아마도 이런 림과 가장 대비되는 자식은 슬리만의 장남 마지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바람둥이로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식당 개업을 앞둔 연회에서 쿠스쿠스 요리를 차에서 꺼내는 것을 깜빡하고 사라져 버린 것도 마지드였다. 골칫덩이 마지드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림이 나선다. 기다림에 지친 손님들 앞에서 필살기 '벨리 댄스'를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림의 압도적인 벨리 댄스가 차지한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림(하프시아 헤르지 분)의 터질 것 같은 배와 관능적인 몸짓이 10여분 가량 이어진다. 관객에 따라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호감과 비호감을 떠나서 그 장면도 너무 길고 과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30분은 그렇게 의미없이 낭비되는 장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대체 감독 케시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얼 보려주려는 것일까?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가족 구성원의 최종적 화합? 튀니지 이민자들의 가족애와 유대감? 벨리 댄스가 보여주는 육체미와 생의 에너지? 이 길 잃은 가족 서사는 어설프게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조잡스럽고 너절한 영화를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다. 이 감독은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묘사, 과도하고 의미없이 사용된 헨드 헬드 촬영과 클로즈업, 유기적이지 못한 서사, 매우 영악하게 사용된 선정적인 벨리 댄스 장면, 그 모든 것이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만든 생선 쿠스쿠스를 나는 그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가 무슨 상을 받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그것은 영화에 붙은 작은 스티커처럼 보일 뿐이다.       


*사진 출처: hyderabad.afin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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