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항구의 아그니(Η Αγνή του λιμανιού, Lily of the Harbor, 1952)'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데이비드 로웰 리치 감독의 '마담 X(Madame X, 1966)'에서 라나 터너는 아들을 향한 절절한 모정을 보여준다.
하층민으로 상류층 남자와 결혼한 홀리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에 의해 어린 아들을 놔두고 떠나게 된다. 세월은 흐르고
홀리는 밑바닥 주정뱅이의 삶을 전전한다. 우연히 홀리의 과거를 알게 된 사기꾼이 아들을 찾아가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그
사기꾼을 죽인 홀리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마담 X'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선다.
홀리의
아들은 그 여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변호인으로 나선다. 매우 잘 만들어진 이 멜로 영화는 더글라스 서크의
'Imitation of Life(1959)'에 나왔던 라나 터너의 유명세에 힘입어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멜로 드라마의 주
관객층인 여성이 영화에서 TV의 연속극(Soap opera)으로 이동하면서, 멜로 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실제로 '마담
X'의 흥행 성적도 시원찮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라나 터너의 열연, 심금을 울리는 서사, 좋은 연출로 멜로 영화의 황금기를
마감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마담 X'에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들을 향한 엄마의 모정이다. 자신의 삶이 망가지더라도 아들만은 지켜내야 한다는
홀리의 집념은 급기야 살인까지 불사하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모성은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신성화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과연
모성은 불멸의 가치인가? 섀리 엘 서러(Shari L. Thurer)는 '어머니의 신화(1995, 까치 글방)'에서 발견된
관념으로서의 '모성'의 역사를 기술한다. 도덕적 의무로 강제된 모성이 신화화되면서 그것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심리적 기제로
작동한다. 라나 터너가 연기한 홀리는 그 모성의 신화를 충실히 재현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지고지순한 모성의 가치에 감동받는다. 이
모성 신화에는 '자기 희생'이 수반된다. 그것이야말로 멜로 드라마로서 '마담 X'를 구축하는 중요한 뼈대이다.
요르고스 차벨라스(Yorgos
Tzavellas) 감독이 1952년에 만든 그리스 영화 '항구의 아그니(Η Αγνή του λιμανιού, Lily of the
Harbor)'는 그런 모성 신화와는 반대되는 관점에서의 부성(父性)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뱃사람으로 살아온 지아코미스 선장은
고향 피레우스 항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 한다. 그에게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다. 귀환 축하 파티가 열리는 밤, 급한 전갈이
지아코미스에게 도착한다. 마리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 거리의 여인 마리아는 젊은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 마리아는 선장에게 딸
아그니의 존재를 알려주지만, 그는 아그니를 혈육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술집 여자로 살아가는 아그니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히고, 아버지의 양아들 안드레아스를 유혹해 파멸시키기로 작심한다. 지아코미스에게는 딸 보다는 자신의 대를 이어 선장이 되려는
양아들이 더 소중하다. 그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아그니에게 빠진 안드레아스는 술과 도박으로 돈을 날리고
선장이 될 기회도 놓친다.
왜 지아코미스 선장은 혈육인 딸 보다 핏줄이 아닌 양아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선장은 무엇보다 아그니의 출신을 확신하지
못한다. 마리아의 유언도, 마리아의 고백 성사를 들은 신부의 증언도 그는 믿지 않는다. 놀랍게도 그가 아그니를 딸로서 인정하게 된
계기는 딸의 등에 자신과 똑같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이다. 유전자 검사로 혈육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의 관객에게는
실소를 자아내는 설정이지만,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1936)'의 장돌뱅이 허 생원이 동이를 아들로 확신하는 증거가
'왼손잡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라. 눈에 보이는 확실한 신체적 증거를 보고나서야 선장은 아그니를 딸로 받아들인다.
여성은 출산의 과정을 통해 모성을 인식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다르다. '부성(父性)'은 자기 결정과 확신을 필요로 한다. 그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부성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그니의 등에 난 점은 지아코미스 선장의 부성을 일깨운다. 딸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나서야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선장은 양아들 안드레아스에게 아그니와의 결혼을 허락하고 함께 살자고 말한다.
영화는 임성한의 드라마 '하늘이시여(2005)'의 기이한 막장 결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드라마에서 젊은 시절 사생아로 낳은 딸과 헤어진 여자는 그 딸을 찾아 양아들과 결혼시킨다. '하늘이시여'의 모성이 어릴 때 버릴
수 밖에 없었던 딸에게 못다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면, '항구의 아그니'의 부성은 떠나려는 양아들을 붙잡기 위해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딸을 받아들인다. 아그니가 자신의 혈육임을 인정한 이후에도 지아코미스 선장에게 양아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50년 넘게 바다를 떠돌던 이 남자는 아들이 있는 과부와 결혼하면서 가족을 이루었다. 그 아들에게 그가 보이는 부성은 결코
'사랑'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선장은 자신의 명망을 이어갈 후계자로서의 덕목을 안드레아스에게 역설한다. 딸은 가족이 될 수
있지만, 후계자가 될 수는 없다.
영화 '마담 X'가 지극한 '자기 희생'의 모성 서사와 모성에 의해 보호받는 아들을 보여준다면, '항구의 아그니'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부성과 그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눈물겨운 분투를 치루는 딸의 여정을 그린다. 초창기 그리스 영화사의 대표적
감독으로서 요르고스 차벨라스는 주로 그리스 비극에 영향을 받은 드라마를 영화로 구현했다. 그가 만든 '항구의 아그니'는 멜로
드라마의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올가미에 묶인 비극적 인물들의 갈등을 화합 속에 봉합한다.
자살을 기도한 딸 아그니는 살아난다. 서사의 완성도를 생각한다면, 아그니는 죽고 연인과 아버지는 파멸에 이르는 결말이 멜로 드라마의 공식에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쓴 차벨라스 감독은 희망의 출구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그리스에서 크게 흥행했는데, 아마도 오랜 좌우 내전과 정치적 혼란에 시달린 그리스 국민들에게는 이 영화의 결말이 꽤나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떠나려는 딸과 양아들을 집으로 불러모으는 아버지 지아코미스 선장의 모습은 전후의 상처를 회복하고 새로운 그리스를 이끌 부성의 반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finosfilm.com 아그니 역의 배우 엘레니 하치아르기리(Eleni Hatziargy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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