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명망있는 과학자 스레텐스키 교수의 일상은 단조롭다. 오직 연구에만 시간을 쏟는 그에게 그나마 말 상대가 되어주는 이는 무뚝뚝한
성격의 가정부 엘자이다. 여느 날처럼 엘자가 차린 저녁을 먹고 있는 교수의 집에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아가씨가 들어온다.
"난 아빠의 딸 타샤에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대학 시험 준비를 도와줄 테니 가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이 집에서 살려구요."
결혼한 지 1년 만에 헤어진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딸은 아내가 키웠는데, 그 딸 타샤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
제멋대로인 딸은 스레텐스키 교수에게 커다란 숙제처럼 느껴진다. 시험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딸과의 짧은 만남 이후, 교수는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몇 년 후, 그 딸은 다시 아기를 안고 찾아온다.
"아빠, 난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요. 아기는 여기다 두고 갈게요. 아빠는 잘 키울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골때리는 딸 타샤는 교수에게 손녀딸 니나를 안겨주고 떠난다. 세월이 흐르고, 니나는 멋진 아가씨로 자란다. 스레텐스키
교수는 이제 연구는 접고 은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젊고 야심에 찬 과학자 코티코프는 교수의 이전 연구가 매우 가치가 있으니
후속 연구를 해보자며 제안한다. 그 즈음, 남편과 헤어진 타샤가 다시 찾아온다. 교수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는 예기치 못한
흔들림이 이어진다.
일리야 아버바크(Ilya Averbakh) 감독의 1972년 영화 '독백(Монолог, Monologue)'은 평생을 과학
연구에만 헌신한 노교수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모스필름, 고리키 필름 스튜디오와 더불어 소련의 3대 국영 영화사 가운데
하나였던 '렌필름(Lenfilm)'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소련 영화에서는 드문 심리 드라마를 보여 준다. 매우 조용하고 건조하게
흘러가는 서사는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스레텐스키 교수와 타샤가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장면에
바로 뒤를 이어 타샤가 아기를 데리고 등장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별로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된다. 아기였던 니나는 16살의 생일 파티 때 소녀의 모습으로 어느새 나타나고, 타샤는 등장할 때마다 이혼과 재혼 같은 삶의
새로운 사건을 몰고 온다. 그런 외부의 변화와는 달리 교수의 옷차림이나 외모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흰머리도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늘 입는 갈색의 양복은 마치 교수의 하나뿐인 외출복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버바크 감독은 '독백'의 서사적 구획을 교수의 유일한 취미인 조립 모형 장난감을 번갈아 비춰주는 것으로 대체한다. 칼싸움을
하는 구식 병정, 코끼리에 탄 전사, 낙타와 유목민, 다양한 모습의 소형 장난감들은 교수가 천착하는 연구와도 같이 내면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을 조립하고 바라보면서 보내는 평화롭고 충만한 시간과는 달리, 교수가 가족과 맺는 외적 관계는 끊임없이
물결이 일렁인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며 툭하면 남자를 갈아치우는 타샤는 딸로서도, 엄마로서도 낙제점이다. 16년 동안이나 자신을
대신해 니나를 키워준 교수에게 애를 버릇없이 키웠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새 남편과 결혼해 아빠 집에서 얹혀 살면서도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다. 이 뻔뻔하고 이기적인 딸에게 스레텐스키 교수는 한결같은 인내와 사랑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태도는 손녀딸
니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가정사의 어려움 속에서도 스레텐스키 교수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과학 연구에 대한 집념과 헌신이다.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 추구라는 과학자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남들은 현업에서
은퇴해 평안한 노후를 보낼 때에 교수는 후배 과학자와 새로운 연구에 몰두한다. 교수는 직설적이고 외골수인 후배 코티코프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포용력도 가지고 있다. 그의 연구 주제가 가진 혁신성 때문에 연구소 측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마침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얻고 명성은 더 커져간다. 그러는 동안, 손녀딸 니나의 연애 문제가 교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별로 아파하는 손녀딸을
위로하지만, 손녀딸은 꼴도 보기 싫다며 폭언을 퍼붓는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그는 바람 불고 스산한 레닌그라드의 네바 강가와 거리를 하릴없이 헤맨다. 영화 제목 '독백'은 교수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의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던 교수의 쓸쓸하고 공허한 내면에는 오로지 혼잣말이
가득할뿐이다. 과학이라는 진리 추구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는 세상과 인간사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연애를 시작한
손녀딸에게 '남자를 조심하려므나'라든가, 이별에 대한 위로도 '시간이 가면 다 잊혀질 거야'라는 평범하고 뻔한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다. 그런 그가 보여주는 인간 관계에서의 순진함과 미숙함은 상처와 고통으로 돌아온다. 그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홀로 헤매다 어스름이 깔린 공원에서 보게 된 14살 때 첫사랑의 환영(幻影)이다. 그는 비로소 응어리진 마음 속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털어놓는다.
영화 '독백'은 학문적인 업적을 쌓은 노교수의 개인사를 통해 관객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다.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는 좋은 영화이다. 과학자로서 쌓은 명성과 지위, 그럼에도 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고독한 내면에 유폐된
교수는 누군가의, 또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리야 아버바크 감독이 레닌그라드의 풍경 속에 풀어놓은 고독한 노교수의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과 인생을 응시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kino-teatr.ru 스레텐스키 교수 역의 미하일 글루즈스키, 그가 이 영화를 찍을 당시의 나이는 54세였다. 자신 보다 더 나이 든 연배의 노교수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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