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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격랑을 견뎌낸 감독, 산(The Mountain, 1956)

 

 "누가 그렇게 날 키워달라고 했어? 그 지긋지긋한 소리 좀 집어쳐."

  그런 말을 하는 막내 동생 크리스(로버트 와그너 분)를 나이든 형 재커리(
Spencer Tracy 분)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자식처럼 키워왔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런 형에게 주먹 날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 막돼먹은 동생이다. 크리스는 산골 마을 호텔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사는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없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그곳을 뜨는 것이 소원인 크리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앞에 자리한 몽블랑 정상에 인도 여객기 한 대가 추락한다. 급파된 구조대는 승객들을 구하러 산에 갔다가 눈과 험한 산세에 그냥 내려오고 만다. 크리스는 불시착한 비행기에 금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형에게 같이 산에 가자고 한다. 오랫동안 산에 올랐고, 산을 사랑하는 재커리는 10년 전 마지막 등반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더이상 산을 오르지 않는다. 형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혼자 가겠다고 나서고 그런 동생을 보다 못한 재커리는 함께 등반에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산 정상에 오른 형제. 죽은 자들의 값나가는 유류품을 쓸어담는 크리스를 보며 재커리는 탄식한다. 비행기 안을 살펴보다 여자 승객 한 명이 살아있음을 발견한 크리스. 그냥 죽게 내버려 두고 떠나자고 하지만, 재커리는 그럴 수 없다. 이 형제의 하산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에드워드 드미트릭(
Edward Dmytryk) 감독의 1956년작 '산(The Mountain)'은 산과 두 형제의 운명적 갈등을 담아낸다. 프랑스 작가 앙리 트로야의 '눈의 탄식'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산악 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컴퓨터 그래픽이나 효과적인 촬영 도구가 없었을 때에 찍은 영화임에도 나름대로 박진감이 넘친다. 등반의 중요한 장면들은 당연히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과 배경을 합성한 것이다. 지금의 영화 기술이라면 더 좋은 장면으로 만들 수 있었겠지만, 영화는 그런 볼거리 보다는 두 형제의 이야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돈에 눈이 멀어 죽은 이들의 유류품을 마구 훔치는 동생 크리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성 승객을 형이 구조해서 데려가려고 하자, 자신의 범죄 행위가 드러난다며 여자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그런 사악한 동생과는 달리, 우직하고 성실하며 착한 심성을 가진 늙은 형 재커리는 어떻게든 여자를 살리려고 애를 쓴다. 선과 악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 형제. 어떻게 한 부모에게서 저렇게 대비되는 자식들이 태어났을까? 원작자 앙리 트로야는 악인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며, 결코 고치거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듯 하다.

  사실 이 영화는 서사 자체가 그다지 극적이거나 대단한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다. 산을 대하는 두 형제의 대비되는 모습, 탐욕에 눈 먼 크리스와 따뜻한 인간성을 지닌 재커리 이 두 형제를 카메라는 묵묵히 따라간다. 평이한 내러티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충실한 연출과 스펜서 트레이시의 무게감 있는 연기 덕분이다. 크리스 역의 로버트 와그너(
Robert Wagner)는 망종(亡種)같은 동생 역을 아주 잘 해내는데, 이 조각같은 외모의 배우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연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헐리우드에서 바람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던 그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배우 나탈리 우드의 남편이기도 했다. 아내의 사망 당시 요트에서 같이 있었던 와그너는 아내의 익사에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평생 동안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영화 속 그의 빛나는 외모에서 어떤 서늘한 비정함과 냉혹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은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케인호의 반란(The Caine Mutiny, 1954)'으로 잘 알려진 감독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영화사의 말단 직원에서부터 경력을 시작한 그는 영화의 모든 것을 밑바닥에서부터 구르면서 배워나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첫 영화를 찍은 것이 스물 일곱. 그저 그런 B급 작품들이라도 열심히 찍었던 그에게 영화는 삶의 구원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194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그는 메이저 영화사에서 비중있는 감독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의 영화 경력은 시대의 광풍을 만나서 좌절되고 만다. 당시에 미국을 휩쓸던 매카시즘의 마수가 영화계에까지 미친 것이다.

  공산주의자로 찍혀서 이른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 실형을 선고 받고 영국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영화 경력을 이어가려고 했으니 여의칠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온 드리트릭은 4개월 남짓 수감 생활을 한 후에 영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동료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겨주고 할리우드로 복귀한다. 그의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 영화계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드미트릭은 다시 날개를 달고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시각에서는 배반이었겠지만, 이 감독에게 있어 영화와 함께 할 수 없는 삶은 죽음과 같았다. 미친 시대를 견디려면, 의리와 고귀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영화의 결말부, 무사히 승객을 구조한 재커리는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아끼던 동생을 잃는다. 그건 어떤 면에서 드미트릭 자신의 이야기와도 겹친다. 자신의 경력을 위해 한때 함께 했던 동료들을 버려야 했던 비운의 감독. 영화 '산'을 보면서,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간 한 감독의 기구한 인생도 들여다 보게 된다.

   

*사진 출처: dvdbe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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