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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플의 특별한 변신, 장례식을 마치고(Murder at the Gallop, 1963)

  이 추리 영화는 시작한 지 4분도 되지 않아서 시신이 나온다. 주인공 미스 마플(마가렛 러더포드 분)은 꽤 덩치가 있고, 약간 부산스럽게 보이는 할머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스 마플에게는 조수도 있다. 홈즈와 왓슨도 아닌데 이 영화 뭐지, 싶어진다. 배경도 경마 클럽이다. 분명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라는데, 내가 읽은 '장례식을 마치고(After the Funeral)'가 이런 내용이었나? 하도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다. 이 영화(Murder at the Gallop, 1963)는 주요한 설정만 원작 소설에서 따왔을 뿐, 나머지는 새롭게 각색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에르큘 포와로가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미스 마플로 바뀌었다. 영화 제목도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경마 클럽 살인 사건'이 맞다.

  재소자 교화를 위한 모금 활동을 하던 미스 마플은 부유한 앤더비 씨 저택을 방문한다. 같이 모금을 하던 친구 스트린저와 함께 집에 들어서자마자, 앤더비 씨는 계단을 굴러 떨어지며 숨을 거둔다. 경찰에서는 심장병을 앓고 있던 앤더비 씨가 지병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미스 마플은 시신 옆에서 발견된 작은 흙조각이 뭔가 마음에 걸린다. 자연사를 가장한 살인의 의도가 있다고 본 마플은 스트린저와 함께 앤더비 일가의 동향을 살핀다. 다음 날, 유언장 공개일에 4명의 상속인 가운데 '타살'이라는 의심을 내보인 앤더비의 여동생 코라가 모자핀에 찔린 채 발견된다. 미스 마플은 사건 해결을 위해 유산 상속인 가운데 한 명인 헥터의 경마 클럽에 머물면서 단서를 찾는다. 과연 누가 범인일까?

  그동안 여러 번 제작된 TV 시리즈의 미스 마플의 이미지를 떠올린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의 미스 마플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가렛 러더포드가 연기하는 미스 마플은 조용히 앉아서 뜨개질을 하며 사건을 추리하는 할머니가 아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단서를 수집하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 할머니, 상당히 과감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의 에르큘 포와로의 특질들을 이 영화에서는 미스 마플이 겉옷으로 두르고 연기하기 때문이다(영화 속에서 미스 마플은 두꺼운 트위드 망토를 걸치고 나온다). 촬영 당시 70이 넘은 나이로 연기했던 마가렛 러더포드는 자신만의 미스 마플을 보여준다. 나중에 클럽에서 열린 무도회에서는 어깨가 드러나는 화려한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고 트위스트까지 춘다. 영화는 그런 마가렛 러더포드의 연기력에 상당부분을 기대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들이라면 나름대로 즐겁게 보겠지만, 영화는 평범하다. 영화사 MGM에서 B무비로 만든 이 영화는 미스 마플 3부작 가운데 하나이다. 뜬금없는 각색은 원작자 크리스티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연 배우 마가렛 러더포드의 연기만큼은 마음에 들어했다. 처진 아래턱이 눈길을 끄는 이 독특한 외모의 배우는 33살이 되어서야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섰다. 늦은 데뷔에다 전형적인 여배우의 아름다운 외모와도 거리가 멀었던 러더포드는 자신의 재능을 코미디에서 발견했다. 노년이 되어 미스 마플을 연기한 세 편의 영화는 꽤 인기를 끌었다.

  그리 뛰어난 미모가 아니었던 또 다른 배우가 이 영화에서 등장한다. 주요한 배역인 밀크리스트 부인을 연기한 플로라 롭슨이다. 개성적이고 강인한 인상의 롭슨은 나에게는 'Fire Over England(1937)'에서의 엘리자베스 여왕 역으로 기억된다. 그 영화에서 롭슨은 유능하고 강단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 여왕을 보여준다. 마가렛 러더포드처럼 롭슨은 외모를 넘어서는 자신만의 연기력으로 영화 경력을 쌓았다. 그 두 배우들 모두 영화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 부터 여성 기사 작위 Dame을 받았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원작자 애거서 크리스티도 Dame 작위를 받았으니, 이 B무비에는 무려 3명의 여성 기사들이 등장하는 셈이다. 원작을 색다르게 각색한 이 영화는 크리스티 추리 소설의 폭넓은 변용을 보여준다. 미스 마플의 특별한 변신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찾아볼 법하다.  


*사진 출처: tcm.com 미스 마플 역의 마가렛 러더포드. 그 옆에 자리한 스트린저 역을 연기한 스트린저 데이비스는 러더포드의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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