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늙어감의 성찰,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姨媽的後現代生活, The Postmodern Life of My Aunt, 2007)

 

  "난 당신이 날 속이지 않기를 바랬어. 난 늙었다구. 만약 내가 17살 때 이런 사기를 당했다면, 까짓거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 당신은 날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모은 돈을 모두 털어간 거라구."

  여자는 자신을 등처먹은 사기꾼 놈팽이에게 그렇게 말한다. 허안화 감독의 2007년작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姨媽的後現代生活, The Postmodern Life of My Aunt)'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이다. 영화는 상하이에 살고 있는 이모 예루탕(사금고와 분)을 찾아가는 어린 조카 콴콴의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콴콴이 바라본 이모는 지독한 구두쇠로 꽤 괜찮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음에도 온갖 궁상에 찌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사는 모습은 구질구질해 보여도, 이모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 뿐이라며 돈푼깨나 있는 이웃들을 경멸한다. 그런 이모에게 답답함을 느끼며 가출해서 자작 납치소동을 벌이는 콴콴. 골칫덩이 조카 보내고 나서 좀 조용하게 사나 싶었는데, 계속해서 이상한 사람들만 꼬인다. 아픈 딸이 있다는 여자를 불쌍해서 집에 데려왔더니, 여자는 딸 병원비 마련한다고 자해공갈일을 벌인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친해진 판지창(주윤발 분)은 알고 보니 사기꾼이다. 예루탕은 평생 모은 돈을 다 털린다.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발을 헛디뎌 큰 부상까지 입은 예루탕에게 화려한 도시의 포스트모던 라이프는 이어질 수 있을까...

  나에게 홍콩 출신의 허안화 감독의 작품은 이 영화가 처음이다. 감독의 다른 작품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영화 세계를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 허안화 감독의 영화적 뿌리가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의 시작은 매우 코믹하다. 돈을 아끼려고 한여름에도 냉장고를 쓰지 않고, 온집안의 전기 코드를 빼놓고 사는 이모. 그뿐인가? 준법 정신은 얼마나 투철한지, 동네 가게에서 길바닥에 생선 찌꺼기 버리는 것을 보고 공안에 즉각 신고한다. 그런 이모의 도시 생활은 꽤나 팍팍하다. 이웃의 소개로 얻은 부잣집 아이의 영어 과외 자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영국식 억양이라며 잘린다. 구두쇠이기는 해도 따뜻한 품성을 가진 이모를 그 도시의 사람들은 이용해 먹으려 든다. 이모의 삶은 전혀 '포스트모던'스럽지 않다. 가치관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삶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으며, 사기꾼이 등처먹기 쉬운 어수룩한 중년의 여자일 뿐이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멈춰있는 나이든 여자, 이 영화의 외피는 코미디이지만 그것을 한꺼풀 벗기면 관객은 곧바로 엄혹한 현실로 진입한다.

  낙상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예루탕에게 딸이 찾아온다. 너절한 놈을 남자 친구라고 데려온 딸은 엄마 간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과 아빠를 버린 비정한 여자라면서 맹비난을 퍼붓는다. 예루탕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니, 예루탕은 10년 전에 시골에 어린 딸과 남편을 내버리고 상하이로 와서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대학을 나온 예루탕이 일자무식의 노동자 남편과 결혼한 건 아마도 문혁 시기의 하방(下放)운동으로 인생이 어긋나서였을 것이다. 무지렁이 남편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인생에서 지우고 새출발을 하기 위해서 온 도시 상하이. 그나마 이어가던 도시의 삶은 사기꾼에게 돈을 털리고 나자 산산조각이 난다. 딸과 함께 시골로 돌아가는 예루탕이 차 안에서 바라보는 상하이의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어지럽다. 도시의 눈부신 밤과 늙은 여자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

  이 영화에 흐르는 정서를 젊은 관객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중년의 여인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늙어감과 그 비애를 담고 있다. 감독 허안화는 급변하는 도시와 그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가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상하이라는 고도로 상업화된 도시와 대비해서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는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던 이모는 사기를 당하고, 온몸이 부서지는 부상을 겪으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며 확 늙은 모습으로 변한다. 젊음과 영악함, 냉정함을 갖추지 못한 이모는 애초부터 거대한 도시의 삶에 맞는 이가 아니었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 품었던 꿈들은 사라졌으며, 몸은 늙어버렸고, 어렵게 모은 돈은 사라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자신이 버렸던 그 시궁창과 같은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이든 관객들에게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의 몰락은 공포 영화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들에게 이 영화는 늙어감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선사한다.

  이모 역을 연기한 사금고와의 연기가 매우 좋다. 젊음과 미모가 없이도 화면을 장악하는 꽉 찬 감정의 연기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사기꾼 역으로 나온 주윤발의 연기는 뻔한 듯 하면서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저 사람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천하의 사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마지막에 떠나는 장면에서 트렌치 코트 휘날리는 뒷모습까지 매력이 흘러넘친다. 배우들의 충실한 연기와 함께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영화의 음악도 흘려버릴 수 없다.    


*사진 출처: itpworldwordpress.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황량하고 고독한 결혼의 풍경, 아내(妻, Wife, 1953)

  *이 글에는 '아내(妻, 195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카가와와 미네코는 결혼 10년차 부부다. 영화는 부부 각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관객은 결혼 10년 동안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서로 푸념하는 부부의 속내를 듣게 된다. 이 부부에게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들은 별다른 소통도 하지 않고 얼굴을 바라보는 일도 거의 없다. 아내에게 마음이 멀어진 남편은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마음이 기운다. 무뚝뚝하며 돈에 집착하는 아내와는 달리, 여직원 사가라는 사근사근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품을 지녔다. 아내가 아닌 새로운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나카가와. 아내는 남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남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과연 이 부부는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내(Wife, 1953)'는 나루세 미키오의 '방랑기(1962)' 원작자이기도 했던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갈색의 눈동자'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부부를 통해 결혼 생활의 황량하고 고독한 풍경을 그려낸다.   나카가와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먹는데, 밥에서 머리카락이 나온다. 미네코는 확실히 살림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하다. 그들 부부의 화해를 위해서 미네코의 친구는 장을 봐와서 식사 준비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본 미네코의 주방은 제대로 된 칼도 없고, 그나마 그 칼도 무딘 상태다. 친구는 자취생의 주방 같다고 말하고, 나카가와는 아내의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답한다. 이 아내는 그렇다고 남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것도 아니다. 저녁에 책 좀 읽고 자려는 남편 옆에서 과자를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먹는다. 식사하고 나서는 젓가락으로 이를 아무렇지 않게 쑤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아내에게 나카가와는 마음이 멀어진다. 그렇다면 미네코의 삶의 낙은 뭘까? 교외에 2층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세를 놓아 살림에...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삶과 작품 세계를 다룬 다큐 세 편

  1. BBC 다큐 'Francis Bacon : A Brush with Violence(1997)', 1시간19분 2. The South Bank Show 제작 'Francis Bacon(1985)', 55분 3. 미국 휴스턴 미술관(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제작, Francis Bacon: Late paintings(2020), 55분 * 위 세 편의 다큐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검색 가능함.   1945년, 런던의 전시회에 걸린 그의 삼면화(triptych, 세 개가 이어진 그림으로 주로 가톨릭의 제단화에 쓰였음)는 관객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2차 대전이 막 끝난 직후여서 사람들은 가급적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가는 기괴하게 변형된 신체와 인물의 이미지들을 자신의 그림 속에 계속해서 변주해 나갔다. 그는 동성애자였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지냈고, 그림으로 누릴 수 있는 명예와 부를 생전에 다 누렸다. 죽어서도 그의 그림을 비롯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소장품이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마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를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그려낸 초상 연작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BBC에서 제작한 다큐는 화가 베이컨의 일대기와 작품, 그의 주변 지인들의 인터뷰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이 다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 아주 좋은 안내자가 되어준다.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불화,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냈던 20대 초반의 시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시작했던 경력의 초창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30대, 그리고 그의 동성 연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이컨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에 무척 솔직했다. 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