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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아역 배우의 뒤안길, 쇼비즈 키즈(Showbiz Kids, 2020)

 

  오래전, 시나리오 수업을 같이 듣던 수강생 가운데에는 연극학 전공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부업으로 연기 학원 강사일을 했는데, 어느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수강생 가운데 가장 어린 아이가 몇 살일 것 같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일고여덟 살 정도가 아니냐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4살'이었다. 알렉스 윈터가 2020년에 만든 다큐 'Shobiz Kids'는 아역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유명한 아역 배우로 쇼비지니스 세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들려주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감독 알렉스 윈터 자신도 아역 배우였다. 그는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 출연했었다. 다큐 속에 나오는 이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E.T.(1982)'의 헨리 토마스,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의 마라 윌슨, 디즈니 채널의 대표 스타 캐머런 보이스, '제 5원소(1997)'의 밀라 요보비치, TV 시리즈 '웨스트월드(2016)'의 에번 레이첼 우드, '스타 트렉'의 윌 휘턴이 그들이다.

  다큐는 성인이 된 그들이 회고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당시의 자료 화면들로 채워져 있다. 아역 배우로서 스타덤에 올랐던 그들이 털어놓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외로움, 상처와 분노를 듣다보면 저 쇼비지니스 세계는 결코 좋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통의 삶에게 이탈하게 만든,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E.T.'의 헨리 토마스는 유명세 때문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캐머런 보이스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서 홈스쿨링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정상적인 학교 교육과 또래 아이들과의 교류에서 단절된 채 자랐다. 숙소인 트레일러와 호텔, 촬영장을 오가는 일상에서 외로움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매니저 업무를 대행하는 부모는 그런 아이를 잘 보살폈을까? 놀랍게도 다큐에 나온 이들 가운데 부모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한 이는 없었다. 밀라 요보비치는 배우였던 어머니의 등쌀에 못이겨 춤과 노래와 같은 온갖 배우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요보비치는 엄마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는 대체제였던 셈이다.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어린 시절부터 모델과 배우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정작 요보비치 자신은 그 일을 원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스무 살 즈음에 엄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나서야 자신이 원하는 경력과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윌 휘턴의 경우는 부모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표현하는데, 휘턴은 부모가 자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학대했다고 회고한다. '돈 문제'는 그들에게 가장 민감하며 골치아픈 문제이기도 했다. 수입을 관리한 부모와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스타들의 이야기 중간에 현재의 아역 배우 지망생들과 그 부모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다. 매일 연기 수업을 받고, 오디션을 보러 돌아다니고, 배역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스타의 길에 대한 매혹은 많은 이들을 그렇게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매혹의 자기장 속에서 배우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Showbiz Kids'는 그 길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어두움도 조명한다. 약물과 일탈, 범죄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조립품처럼 그 성공담에 끼워져 있다. 흑인 아역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토드 브리지스는 마약으로 고생했다. 거기에다 마약상에게 총을 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겨우 풀려났다. 윌 휘턴은 'Stan by Me(1986)'에서 함께 공연했던 리버 피닉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작업 현장에서 겪었던 성적인 학대 문제도 언급된다. 에번 레이첼 우드와 윌 휘턴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도 딱히 무슨 명확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역 배우들의 노동 조건과 관련한 법적인 여건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문제들은 해결이 쉽지가 않다. 어쩌면 재능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욕망의 투사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쇼비지니스 사업은 그런 부모들의 욕망과 부합하며, 그 속에서 스타가 된 아이들은 갑작스런 부와 명성을 다루지 못해 쉽게 상처받는다. 다큐에 나온 이들은 성인이 되면서 그런 어려움들을 나름대로 다루는 법을 터득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쯤되면 그들에게 과거의 눈부신 아역 스타 시절이 정말 좋은, 행복했던 기억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Showbiz Kids'는 아역 배우들과 쇼비즈니스 산업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다큐이기는 하다. 그러나 감독 알렉스 윈터는 이 다큐에서 그 어떤 작가적 관점도 보여주지 못한다. 인맥으로 따낸 배우들과의 인터뷰와 영상 자료 화면들을 열심히 구해서 이어붙인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이 아니라 편집자 크레딧에 올라야 마땅하다.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큐를 보고 나서 관객들은 도대체 감독이 무엇을 했는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이 관점 부재의 다큐를 메꾸는 것은 오직 인터뷰를 해준 배우들의 진실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한번 찾아서 볼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observer.com 좌측부터 순서대로 감독 알렉스 윈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헨리 토마스, 마라 윌슨, 에번 레이첼 우드, 토드 브리지스, 윌 휘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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