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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즈네프 시기의 표류하는 노동자, 아포냐(Афоня, Afonya, 1975)

  

  그동안 구 소련 시절의 영화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독자들 가운데에는 별로 재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무슨 구닥다리 영화를 저렇게 보나, 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영화들이 정말로 재미있다. 재미가 없는데도 억지로 보고 과제처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영화가 시작할 때 모스 필름(Mosfilm)의 로고가 뜨는 것만 봐도 정겹다. 잘 알려지지 않은 소련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중에라도 러시아 영화를 접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도 있다. 무엇보다 그 영화들이 나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거기에 소련 사람들의 삶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진 보통 사람들의 삶이 영화 속에 다채롭게 펼쳐진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아포냐(Afonya, 1975)'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모범적 시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등장한다. 배관공 아파나시(애칭 아포냐)는 '인민의 적'까지는 아니지만, '인민의 골칫덩이'임에는 분명하다. 영화는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니는 아포냐가 행복을 찾는 여정을 그린다.

  배관공으로 일하는 아포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대충 하고, 고객들에게 수리비를 더 뜯어내기도 한다. 아포냐는 술을 무척 좋아해서 보드카를 가지고 다닐 정도다. 늘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포냐에게 질려서 동거하던 여자 친구도 떠나버린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알게 된 미장공 콜랴와 함께 지내게 된 아포냐, 콜랴는 대책없이 살아가는 아포냐를 걱정한다. 그러나 아포냐는 술에 취해 연못에 빠져 음주 단속 경찰에 체포되는가 하면, 클럽에서 싸움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런 아포냐를 예전부터 짝사랑한 어여쁜 간호사 카챠는 아포냐와의 미래를 꿈꾸지만, 아포냐는 무관심하다. 수리하러 갔다가 알게 된 미모의 고객 엘레나에게 마음을 뺏긴 아포냐는 엘레나의 호감을 얻기 위해 남의 집 새 싱크대까지 뜯어 바꿔주기까지 한다. 과연 아포냐의 인생에도 볕들 날이 있을까...

  "자넨 결혼을 해야 해. 가정은 국가의 기초를 이루지."

  아포냐처럼 술을 좋아해서 아내에게 쫓겨난 신세이면서도 콜랴는 아포냐에게 그렇게 충고한다. 이젠 젊은 나이도 아니고 중년을 향해 가는 아포냐에게는 삶의 즐거움이나 목적이 없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그저 대충 때우면서 살아갈 뿐이다. 자신이 맡은 구역이 아니면 아파트 배관이 터져서 주민들이 고생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상사는 작업장에 견습 온 학생들도 배정해주지 않는다. 상사에게 따져서 억지로 견습생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는데, 그 견습생들은 결국 배울 게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배정해달라고 하소연한다. 술 문제로 사고칠 때마다 지역 위원회에 불려가서 자아비판 당하는 것도 여러 번이다. 반복되는 경고 처분에도 소용이 없자, 집으로 찾아온 회사 간부는 아포냐에게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네 문제가 뭔지 아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거야. 그건 범죄자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범죄와 같다구."

  그는 아포냐 같이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조직 사회의 규율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체제의 오물로 취급한다. 확실히 이 영화 속 주인공 아포냐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이상으로 삼는 바람직한 인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뭔가 삐딱선을 탄, 목표도 없이 부유하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배관공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대체 뭘까? 어릴 때 어머니를, 아버지는 전쟁통에 잃은 아포냐는 고모의 손에 자라면서 고아 신세는 면했지만, 아포냐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 같은 것이 있다. 아포냐는 고향 마을에서 엘레나와 함께 아이들을 키우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엘레나에게 아포냐는 배관공일 뿐이다.

  1975년, '아포냐'는 그 해 개봉된 소련 영화들 가운데 무려 6200만 명이 관람하며 관객 동원 1위를 차지했다. 사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이 영화는 그다지 큰 재미는 없다. 영화는 당시 소련에서 유행했던 여러 노래들이 흘러 나오는데, 다넬리야 감독은 자신의 영화들에서 특히 음악에 신경을 많이 썼다. 아마도 소련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문화적 공감대가 흥행의 한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포냐가 보여주는 체제에 대한 무관심과 비순응성이야말로 당시의 관객들이 열광한 부분이었다. 그즈음 소련은 기계적 규율과 엄혹한 통치로 인민의 삶을 강제하는 것에 서서히 부하가 걸리는 징후를 보인다.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 침체와 수구적인 사회 분위기에 소련 사람들은 염증을 느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보드카 소비량(음주 단속 전담 경찰이 생길 정도였다), 코미디 영화의 기록적인 흥행에는 그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있다.

  이도 저도 되는 일도 없이 좌절만 하는 아포냐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다넬리야 감독은 공산주의 사회의 표류자, 경계인인 아포냐를 어떤 식으로든 구제해야만 했다. 마치 구원의 여신 같은 착하고 아름다운 카챠가 아포냐를 찾아 온다. 카챠 역을 연기한 에프게니아 시모노바는 이 영화로 단번에 인기 스타가 되었다. 뭔가 중년 아저씨에게 어울리지 않는 순진무구하고 앳된 아가씨 역은 시모노바에게 배우 인생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 이후에 이어진 역들이 대부분 청순가련형의 캐릭터들이어서 배우 자신은 이 영화를 아쉽게 생각했다.

  다넬리야 감독에게 이 영화가 갖는 의미도 그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Walking the Streets of Moscow, 1964)'와 '가을 마라톤(Autumn Marathon, 1979)'에서 보여준 그만의 영화적 감수성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아포냐'는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소련의 체제와 그 속에서 방향을 잃은 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다넬리야 감독은 소련의 컬트 SF영화라고 할 수 있는 'Kin-dza-dza!(1986)'에서도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검열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신의 시대와 공명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낸 이 감독의 영화적 여정에는 그렇게 소련이란 나라와 그곳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사진 출처: filmpr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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