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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영화의 숨겨진 보석, Bye Bye Blues(1989)

 

 *이 글은 'Bye Bye Blues'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심해라, 넌 애들 키우는 엄마야!"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그렇게 소리친다. 그러나 여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일하러 나간다. 캐나다의 여성 감독 앤 휠러(Anne Wheeler)의 'Bye Bye Blues(1989)'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캐나다 가정주부의 고군분투 취업 생존기를 보여준다. 전쟁은 전장에 있는 군인들 뿐만 아니라 후방에 남아있는 이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국가의 경제 기능이 전쟁에 맞추어져 있는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여성들에게 가장 큰 문제였다. 생존을 위해 여성들은 비자발적인 취업 전선에 내몰렸다. 'Bye Bye Blues'의 주인공 데이지도 그런 여성들 가운데 하나였다. 군의관 남편을 따라 식민지 싱가포르에서 귀부인처럼 살았던 데이지는 1941년, 일본의 싱가포르 침공으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뒤바뀐다. 여자는 캐나다 알버타 시골 마을 시댁으로 귀환한다.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아이들 둘을 데리고 쪼들리는 생활을 하던 데이지는 생활 전선에 나선다. 동네 재즈 악단에서 피아노 연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것. 시부모의 간섭을 피해 독립한 데이지는 곧 일하는 여성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휠러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부모에게서 들은 젊은 시절 이야기였다. 실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던 감독의 아버지, 그리고 가족을 위해 일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에 살이 붙여졌다. 영화는 매우 소박하고 평범한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현실의 뿌리가 자리하고 있다. 비록 생계를 위해 시작했던 일이지만, 데이지는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식민지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은 남편의 사랑과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넘쳐났다. 그곳 사교 파티에서 구색 맞추기로 연주하고 노래했던 마나님은 이제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며 악단 생활을 한다. 영화는 데이지가 어떻게 치열한 취업 전선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보여준다. 데이지는 담배를 피우고, 남자들인 밴드 동료들과 부대끼며 유대감을 쌓고, 출연료를 갈취하는 밴드 마스터와 대결하기도 한다. 트롬본 연주자 맥스는 그런 데이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 속에서 로맨스도 피어난다.

  그러나 'Bye Bye Blues'는 로맨스 보다는 일하는 여성이 겪는 내적인 갈등과 현실적 어려움에 더 촛점을 둔다. 나의 눈길을 끈 두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데이지가 담배를 배우는 장면이다. 맥스는 데이지에게 담배를 권하고, 그렇게 데이지는 담배를 피우게 된다. 재즈 밴드는 전형적인 남자들의 세계이며, 거기에 진입하고 적응하기 위해 데이지는 새로운 규범을 배울 수 밖에 없다. 친밀함과 소통으로서의 흡연은 그 세계의 일반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또 다른 장면은 밴드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동안 길에 잠깐 차를 세우는 장면이다. 차에는 데이지가 혼자 남아있고, 4명의 밴드 단원들은 길 건너 편에서 볼일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연주'라는 하나의 목표로 움직이는 동료들이지만,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은 명백히 존재한다. 여성 연주자 데이지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으므로, 밴드 단원들은 데이지를 보호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출연료 문제로 밴드 마스터와 싸울 때, 데이지가 뺨을 맞고 욕설을 듣자 맥스는 데이지의 편에 서서 맞선다. 또한 동료들은 취객들의 지분거림을 막아내기도 한다.

  그렇게 데이지가 취업 전선에서 애쓰는 동안, 데이지의 아이들은 친한 사이의 시누이 프랜시스가 돌본다. 그러나 이 자유분방한 시누이는 공군 기지에 주둔한 호주 군인과 사귀면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한다. 어머니로서 데이지는 그런 시누이의 행태에 화를 내지만, 자신이 전적으로 해낼 수 없는 양육에서 타협은 필수적이다. 일하는 여성 데이지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부채의식, 부재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맥스와의 사랑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데이지에게 열어준 자아실현의 장으로서의 연주자라는 직업, 그리고 새로운 사랑의 발견은 그 전쟁이 끝남으로써 성급히 닫힌다. 투어 도중 잠시 집에 들렀던 데이지는 귀환한 남편을 맞이한다. 시부모와 시누이를 비롯해 아이들은 모두 기쁨 속에 있지만 오직 한 사람, 데이지는 그렇지 못하다. 털털거리는 낡은 차에 탄 맥스와 동료들은 데이지를 뒤로 하고 길을 떠난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 데이지의 표정에는 안타까움과 착잡함이 묻어난다. 그것은 단지 데이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여성들에게 활짝 열렸던 사회 진출의 문은 닫혔고, 여성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갔다. 일하는 산업 역군으로 칭송했던 국가는 이제 그들이 있어야할 원래 자리가 '집'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Bye Bye Blues'는 2차 대전 시기 캐나다 여성의 삶을 조망하면서, 일하는 여성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어려움들을 다룬다. 그것은 비단 전쟁 시기에만 국한되는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사적인 영역에서 '가사 노동'을 수행하던 주부가 공적 영역인 사회에서 일할 때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영화 속 주인공 데이지의 모습과 비슷하게 겹친다. 물론 오늘날의 여성은 데이지처럼 가정이냐, 일이냐와 같은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입장에 놓여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데이지가 보여주는 현실 드라마 속에는 아내, 엄마,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여성의 직업과 자아실현이 갖는 의미, 그러한 보편적 주제에 대한 세밀한 성찰이 들어있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낡고 고리타분한 지난 시대의 이야기라는 편견에서 구해낸다.

  잘 알려진 재즈 스탠다드 'Bye Bye Blues'를 비롯해 영화를 위해 작곡된 여러 재즈곡들도 흥겹다. 데이지 역을 맡은 레베카 젠킨스의 매력적인 보컬도 거기에 한몫을 한다. 영화는 자국에서 개봉된 이후 오랫동안 관객들을 만날 수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저작권과 관련된 문제였다. 제작사가 파산하면서 저작권이 여러 번에 걸쳐 쪼개져 분산되는 바람에 저작권자를 특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2013년이 되어서야 영화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휠러 감독에게 가장 기쁜 일이었겠지만, 관객들도 이 영화를 통해 캐나다 영화의 숨은 보석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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