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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기억,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A fost sau n-a fost?, 12:08 East of Bucharest, 2006)

 

*이 글은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주요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독재자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않지만, 아마도 현대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독재자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아닐까 싶다. 20년이 넘게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던 이 독재자는 도망치는 장면이 루마니아 전국에 생중계 되었으며, 체포된지 이틀 만에 곧바로 처형되었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자의 죽은 모습을 전세계 방송국에 열심히 뿌렸다. 지금과 같은 방송 윤리 기준에서라면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을 1989년이 저물어 가던 12월의 끝자락에 대한민국의 TV 뉴스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죽은 독재자의 모습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그것은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만들었다. 루마니아의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Corneliu Porumboiu)의 2006년작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12:08 East of Bucharest)'는 1989년의 루마니아 혁명을 16년이 지난 시점에서 회고한다.

  부쿠레슈티 동쪽의 소도시 바슬루이, 사람들은 성탄절 준비로 들떠있다. 지역 방송국의 책임자인 버질은 혁명 16주기를 기념하는 생방송 토크쇼를 기획한다. 그러나 초빙하려는 연사들이 모두 거절하자 궁여지책으로 자신이 알고 지내는 두 사람에게 부탁한다. 한 사람은 까다롭고 엄격한 노인 피스코치, 다른 한 명은 늘 술에 절어 사는 역사학과 교수 마네스쿠이다. 토크쇼의 주제는 '16년 전인 1989년 12월 22일, 바슬루이 광장에서 정말로 혁명의 시위가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바슬루이 주민들이 차우셰스쿠가 도주하던 시각인 낮 12시 8분 이전에 주도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고 독재자의 축출을 요구했는지, 아니면 그 이후에 소식을 듣고 놀라서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가 토론의 쟁점이 된다.

  마네스쿠 교수는 광장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시위를 시작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버질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세세히 들려줄 것을 요구하고, 교수는 지인들과 함께 비밀 경찰과 맞섰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버질은 토크쇼 중간 중간 시청자들의 전화를 받아서 의견을 듣는다. 그런데 마네스쿠 교수는 그때 술집에서 취해있었고 방송에서 하는 말들은 거짓말이라는 전화가 이어진다. 과연 교수의 말대로 16년 전 그날, 바슬루이 광장에서 혁명의 움직임이 있었을까? 아니면 몇몇 사람들의 증언대로 광장은 비어있었고, 교수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일까...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은 루마니아 뉴웨이브(Romanian New Wave)의 대표 주자로 자신의 영화들에서 차우셰스쿠 이후 루마니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고향 바슬루이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 영화도 바슬루이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Police, Adjective(2009)'에서도 바슬루이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경직된 루마니아 사회와 비효율적인 관료주의를 보여준다. 그가 고향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가장 익숙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찍기에 좋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각본은 감독이 고향에서 보았던 실제 TV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받아서 씌여졌다. 포름보이우는 작은 소도시를 배경으로 루마니아의 현실을 짜임새있고 치밀하게 직조해 나간다.

  과연 바슬루이에 진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렇다고 주장하는 마네스쿠 교수의 말은 연이은 시청자들의 전화 증언에 무너져 내린다. 교수가 맞서 싸웠다는 비밀 경찰은 전화를 걸어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면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는 현재 자신이 백 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중소 기업의 수장이며, 당시 비밀 경찰국에서 회계사로 일했을 뿐이라며 강변한다. 이 장면에서 포름보이우는 루마니아 혁명의 씁쓸한 일면을 부각시킨다. 혁명으로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루마니아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차우셰스쿠 주변의 권력 엘리트들이 그대로 정권을 인수했으며, 말 그대로 '그 밥에 그 나물'인 기득권 세력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루마니아를 깊은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비밀 경찰에 몸담았던 회계사는 16년이 지난 시점에서 어엿한 기업체의 사장이 되었다. 토크쇼를 진행하던 버질은 그의 말에 쩔쩔매면서 교수를 몰아세운다.

  깊은 빡침을 느낀 마네스쿠 교수도 가만 있지 않는다. 진행자 버질에게 그때 넌 뭐하고 있었느냐고 반격한다. 버질은 자신의 개인 사업체나 다름없는 지역 방송국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교수의 말에 따르면, 16년 전에 버질은 공장 기계나 만지고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엔지니어였다. 교수는 그런 그가 혁명 당시 아무 것도 하지도 않았으면서 지금 시점에서 혁명이 있었네 마네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비꼰 것이다. 그 지점에서 포름보이우는 저널리즘에 대한 전문적 이해도 없는 장사꾼 같은 버질이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혁명 이후 루마니아 언론은 소수 언론 재벌에 의해 독점되면서 자정과 비판 능력을 상실했다. 이렇게 영화 속 토크쇼 촬영 장면은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가득하다. 화면은 기울어져 있고, 때로 흔들린다. 무슨 영화를 이렇게 엉터리로 촬영했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촬영 기사가 버질에게 삼각대(Tripod)가 고장났다고 하소연 한다.  

  잠자코 있던 피스코치 노인이 들려주던 그날의 기억은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들도 채워져 있다. 나는 영화 속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본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렸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여느 때처럼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리길래,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 보니 근처 도로를 시위대가 가득 메우고 크게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로는 '저러다 세상 뒤집어 지겠네'가 아니라 '뭔가를 하고 있구나'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뉴스에서 직선제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시위의 열기는 금새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그 항쟁이 미완의, 좌절된 혁명임을 증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변혁을 바랬다기 보다는, 현실의 안정에 더 큰 무게추를 두었다.

  포름보이우 감독이 들려주는 혁명 이후의 루마니아 사회는 암울함과 답답함으로 채워져 있다. 결코 회복하지 못한 경제 침체와 청산되지 않은 독재 권력의 유산은 오늘날 루마니아가 당면하고 있는 크나큰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개인의 미시사적 기억을 통해 과거의 역사로서 혁명의 의미, 그것이 현재에 드리운 기나긴 그림자를 들여다 본다. 관객들은 단지 '루마니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사회적 격변의 시기도 함께 성찰해 보게 된다.   


*사진 출처: filmlin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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