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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狂人)과 그 주변의 풍경, 조지 왕의 광기(The Madness of King George, 1994)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 세자는 '의대증(衣帶症)'이라는 병을 앓았다. 일종의 강박증으로 옷 입는 것을 고통스러워 했던 병이었다. 영국 하노버 왕가의 조지 3세도 정신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당시의 기록은 왕의 질병에 '광기(madness)'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꺼려했던 탓인지, 가계의 유전병인 '포르피린증(Porphyria)'의 다양한 증상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연구자들은 조지 3세가 앓았다고 추정되는 병이 '포르피린증'인지도 불분명하며, 남겨진 기록으로 볼 때 기분 장애(mood disorder)의 일종인 '양극성 장애(조울증)'를 앓았을 거라고 본다. 조지 3세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고 말을 멈추지 못했으며, 흥분한 상태로 궁정을 질주하거나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행동들은 '조증(躁症)'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간주된다.

  앨렌 베넷이 쓴 희곡 'The Madness of George III'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조지 왕의 광기(1994)'는 조지 3세의 재위 후반기에 발병한 광기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왕의 광기가 발병한 이후, 그 과정에서 벌어진 왕세자와의 권력 다툼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조지 3세의 기나긴 재위 기간 동안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던 왕세자는 부친의 병을 기회로 삼아 왕의 자리를 넘보려고 한다. 물론 사치스럽고 방탕한 왕세자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리다. 의회는 조지 3세의 정치적 동반자인 피트 수상이 잡고 있다. 비밀스럽게 의회의 지지자를 모은 왕세자는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시켜나간다. 한편 피트 수상과 샬럿 왕비는 왕의 치료를 위해서 의사 윌리스를 초빙해 온다. 과연 윌리스는 조지 왕의 광기를 잠재울 수 있을까?
 
  언젠가 EBS의 세계 테마 기행 영국 편을 보는데, 조지 왕이 말년에 정신질환으로 연금 상태로 지냈던 별궁이 나왔다. 궁전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 비좁고 단촐한 일반 주택처럼 보였다. 응접실은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전부였는데, 저런 곳에 갇혀있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영화에서 미쳐버린 조지 왕이 유폐된 별궁은 그것과는 달리 상당히 넓다. 아무튼 초빙된 명의 윌리스는 자신의 조수들과 함께 왕의 '치료'를 시작한다. 그런데, 말이 치료이지 당시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란 처참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잭 니콜슨이 주연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에서 묘사된 정신 병동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영화의 원작 소설(1963) 작가 켄 케이시는 당시 미국에서 만연하던 정신 병동의 비윤리적인 치료와 억압적 행태에 대해 비판했고, 그것은 정신 의학계에 반성과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20세기에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 1788년 무렵에 윌리스가 쓴 방법은 학대에 가까운 감금이었다. 왕이라서 얻어맞지 않았다 뿐이지, 당시 광인들은 폐쇄된 곳에서 폭력과 감금으로 죽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화는 18세기 영국의 정신 질환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윌리스가 나무로 된 구속(拘束) 의자에 조지 3세를 강제로 앉히고 묶는 장면에서 헨델의 '대사제 자독(Zadok the priest)'이 장엄하게 흐른다. 영국 왕실의 대관식 음악이 그 장면에서 쓰인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은유라 오히려 별 다른 감흥이 없다. 고증에 따라 재현된 의상, 영화 전편을 흐르는 바로크 음악들, 촬영 장소로 쓰인 영국의 멋진 궁전들, '조지 왕의 광기'는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조지 3세를 연기한 나이젤 호손의 열연은 큰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자신을 사로잡은 광기로 고통받는 왕의 모습을 호손은 처절하고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영화는 조지 3세가 광증에서 벗어나 다시 권좌를 회복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의 병은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을 유폐 상태에서 지내다 삶을 마감했다.

  '조지 왕의 광기'는 왕실과 의회 사이의 권력 암투도 실감나게 그려져 있지만, 나는 이 영화를 정치 드라마가 아닌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흥미롭게 보았다. 헬렌 미렌이 연기한 샬럿 왕비는 미쳐버린 남편에 대한 슬픔과 연민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왕비는 왕이 끔찍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무기력하게 기다릴 뿐이다. 영화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 정신질환을 앓게 될 때 주변 사람들이 겪는 정서적 어려움과 현실적 문제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광기'는 왕이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는 권력의 상실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다. '조지 왕의 광기'는 왕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홀로 견뎌야만 하는 어둡고 긴 고통의 시간과 그 가족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사진 출처: pics.alphacod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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