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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책과 두 편의 다른 영화, 니안짱(にあんちゃん, My Second Brother, 1959)

 

  1958년, 재일 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가 쓴 '니안짱'이란 제목의 일기 모음집이 출판된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4남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인 1959년에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일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 '니안짱'은 일기를 쓴 주인공인 막내 스에코가 둘째 오빠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같은 해, 유현목 감독도 일기책 '니안짱'을 영화로 만든다. '구름은 흘러도'란 제목의 이 영화는 당대 한국 영화의 스타들이 꽤 많이 나온다. 무엇보다 주인공 말숙 역을 맡은 김영옥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아역 배우가 원로배우 김영옥 씨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영화는 동일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는데도, 서로 다른 부분들이 눈에 띈다. 처절한 가난을 다룬 점은 동일하지만, '니안짱(My Second Brother)'이 재일 한국인의 현실을 삽화적으로나마 묘사했다면 '구름은 흘러도'는 어린 소녀의 성장에 더 비중을 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니안짱'에 대해 나중에 술회하기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가 아니라 영화사(니카츠)의 문예 영화였기 때문에 큰 애착을 갖고 찍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영화는 촬영과 연출, 여러 부분에 걸쳐서 공들여 찍었음을 알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후쿠시마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광부들의 파업 장면을 비롯해 어촌 마을의 일상, 그곳 주민들의 가난에 찌들린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53년으로 당시의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던 때였다. 탄광촌의 경우는 생존의 여건이 더 열악했다. 종전 후 일본은 주력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탄광들이 문을 닫았다. '니안짱'의 4남매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광부인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말 그대로 거친 세상에 내던져 진다. 큰 오빠는 탄광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기를 바라지만, 이미 많은 인력이 해고되는 상황이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둘째 언니는 인근 도시의 정육점에 취직하고, 니안짱과 스에코는 이웃 헨미 씨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한다.

  유현목 감독은 '구름은 흘러도'의 화자를 말숙으로 설정하고, 말숙이 쓰는 일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와는 달리 이마무라 쇼헤이는 스에코와 니안짱을 공동 화자로 설정한다. 일기를 쓰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니안짱'은 내러티브의 많은 부분을 4남매와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에 쓴다. 4남매는 탄광촌의 재일 한국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비롯해 일본인 이웃들(헨미 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영어 자막에서는 재일 교포(조선인)라는 점이 일본어 대사처럼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서양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 같은 조선인이라 하더라도 욕심 사나운 이웃 할머니처럼 4남매를 이용해 먹으려는 이도 있고, 첫째 오빠의 친구로 고물 장사를 하는 착한 이도 있다. 영화는 조선인 공동체가 일본 사회에서 받는 차별과 냉대를 모호하게 처리한다. 아마도 그런 민감한 부분을 드러내기 보다는, 4남매의 가난과 고통스런 현실을 일본 관객들에게 더 부각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1959년쯤 되면, 일본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누리면서 자신들의 어려웠던 시절을 조금은 성찰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영화 속 4남매가 고통스런 가난의 현실 속에서 가족애를 보이는 모습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괴롭고 힘든 현실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구름은 흘러도'의 맨발의 말숙(말숙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맨발로 나온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담임 선생처럼, '니안짱'에서도 담임 선생과 보건소 카네코 선생이 스에코에게 힘이 되어준다. 두 영화는 4남매가 가난 때문에 떨어져 지내는 것과 둘째 오빠 니안짱의 가출 소동을 비롯해 여러 에피소드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구름은 흘러도'가 말숙의 일기가 출판되면서 탄광촌에 금의환향하는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니안짱'은 가출했던 니안짱이 돌아와 스에코와 탄광의 언덕배기를 힘겹게 오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내겠다'는 니안짱의 마지막 독백은 일본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고자 하는 재일 한국인 소년의 동화 의지를 보여준다. 각색 작업에도 참여한 이마무라 쇼헤이는 소녀의 목소리 대신에 강인한 성격의 니안짱의 목소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에서 4남매를 구원한 것은 스에코의 글이었다.

  '니안짱'의 개봉과 함께 책은 더욱 불티나게 팔렸고, 책의 인세가 4남매의 안정적 삶을 보장해 주었다. 원작자 야스모토 스에코는 와세다 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문인으로 평탄한 삶을 이어갔다. 그야말로 책 한 권으로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현목 감독의 '구름은 흘러도'의 결말이 그들 4남매의 후일담과 더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 영화 가운데 유현목 감독의 연출이 좀 더 좋다고 느꼈다. 물론 '구름은 흘러도'는 재일 교포라는 원작자의 출신 배경이 제거된 맥락으로 만들어졌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견디려는 소녀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작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니안짱'은 스에코의 목소리 대신에 4남매가 겪은 비참한 가난의 현실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일본인들이 지나온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 영화를 재일 조선인의 시련기 내지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본 일본인들의 감상은 가난했던 그 시절에 대한 소회와 가족애에 대한 공감이 주류를 이룬다. '니안짱'을 보는 한국 관객들은 영화가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또는 의도적으로 숨긴 재일 교포들의 차별적 현실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미완의, 상상력을 활용해 메꾸어야 하는 불완전한 영화적 텍스트로 남겨진 셈이다.  


*사진 출처: nikkats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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