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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와일더가 그려낸 음울한 헐리우드의 초상,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

 

  어제 KBS에서 방영된 자연 다큐멘터리 '완벽한 행성, 지구'를 보는데, 내레이션이 감성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들렸다. 다큐 중간에 해설자의 이름이 떠서 보니 배우 김승우였다. 대개 그런 자연 다큐멘터리들의 해설은 성우나 아나운서들의 몫이지만, 가끔은 배우들이 할 때가 있다. EBS에서 했던 3부작 자연 다큐 '천국의 새'에서는 배우 이혜영이 내레이션을 했다. 정말로 멋지고 완벽한 내레이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 걸 보면 배우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발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성 영화 시절의 배우들은 그런 발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었다. 자막과 음악으로 처리되는 화면에서 배우들은 무성 영화에 특화된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은 무성 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 배우였다. 스완슨은 자신의 영화사까지 차려서 영화를 찍을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유성 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전 시기 배우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천하의 스완슨도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 이후로 잠정 은퇴 상태였던 스완슨을 다시 불러낸 것은 빌리 와일더였다.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는 잊혀진 배우 스완슨을 완벽하게 복귀시켰다. 빌리 와일더는 이 영화에서 헐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자신만의 음울하고 통렬한 성찰을 보여준다.

  헐리우드의 B급 시나리오 작가인 조(윌리엄 홀덴 분)는 살던 집의 집세가 밀리고 차까지 압류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떻게든 글을 써서 먹고 살 방도를 찾으려 하지만, 정글같은 헐리우드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압류 회사 직원을 피해 차를 몰다가 우연히 막다른 길에 들어선 그는 황량한 외관의 대저택을 발견한다. 차만 숨기고 나오려던 그는 얼떨결에 집사(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분)의 안내로 주인과 만나게 된다. 조는 키우던 원숭이의 죽음으로 애통해하는 중년의 여자가 은퇴한 무성 영화 배우 노마 데스먼드임을 알아차린다. 여주인은 조가 시나리오 작가라는 말을 듣고 복귀작으로 집필중인 시나리오 원고를 맡긴다. 마지못해 일을 시작한 조는 점차 노마가 제공하는 돈과 안락한 삶에 익숙해진다. 현실과 담을 쌓고 과거의 영광에 도취해 살아가는 노마는 조에게 구애하고, 조는 그런 당혹스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시나리오 집필에 착수한다. 영화사 시나리오 담당인 베티와 함께 시나리오를 써나가는 조, 노마는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조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영화는 풀장에 뜬 시신과 함께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조는 이미 죽었고, 영화는 죽은 자인 조의 시점에서 회고하는 6개월 전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흔히 필름 느와르로 분류되는데, 과연 그렇게 보는 것은 타당할까? 확실히 영화의 분위기는 으스스하고 기괴하다. 노마가 살고 있는 대저택의 외관은 거의 버려진 폐가처럼 보인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격리된 장소, 그곳의 주인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를 박제해놓은 집에서 살고 있다. 거실은 배우 시절의 사진 액자가 잔뜩 들어차 있고, 그곳에서 노마는 무성 영화 시절의 영화계 친구들과 가끔씩 카드놀이를 한다. 자신이 주연한 영화를 틀어놓고 보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이 은퇴한 여배우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단 한 가지, 젊음만이 없을 뿐이다. 자신이 늙었고, 다시는 영화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노마는 마치 화석처럼 살아가고 있다.

  빌리 와일더가 글로리아 스완슨을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노마 역에 스완슨이 아닌 다른 배우를 쓸 수 있었을까?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후, 단절된 경력 속에서 잊혀진 배우 스완슨, 그리고 그의 집사 맥스로 나온 이는 무성 영화 시절을 대표하는 감독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이다. 대표작 'Greed(1924)'로 잘 알려진 이 감독은 실제로 스완슨이 만든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기도 했다. 노마가 집에서 감상하는 자신의 영화 'Queen Kelly(1932)'는 스트로하임이 연출한 작품이다. 스트로하임은 그 영화를 찍다가 제작비를 너무 많이 써서 스완슨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일이 있다. 빌리 와일더는 이전 무성 영화 시대의 쟁쟁한 인물들을 한데 그러모은다. 노마의 카드 놀이 친구로 등장하는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은 무성 영화 시절의 감독 겸 배우였고, 노마가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를 방문할 때 만나는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은 무성 영화 시절에 스완슨과 함께 했고 유성 영화시절에도 명성을 날렸던 감독이었다.

  비극은 노마가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에 안주하지 못하고 현실로 틈입하려고 끈질기게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돈으로 굴복시킨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의 젊음과 사랑은 결코 노마의 것이 될 수 없다. 영화사에서는 늙어버린 여배우가 아닌 소품으로 쓰려는 노마의 비싼 클래식 자동차에 관심을 둘 뿐이다. 시들고 낡은 것은 버림받는다. 빌리 와일더는 영화 산업이 어떻게 자신의 영역 속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소모시키며 그것을 바탕으로 번영하는지를 노마와 그 주변인물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선셋 대로'는 빌리 와일더가 바라보는 헐리우드의 냉혹한 속성, 은막 뒤의 감춰진 것들에 대한 처절한 초상이며 성찰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MGM의 제작자 메이어는 와일더가 영화 산업과 그 종사자들을 모독했다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노마의 애완 동물로 살다가 죽은 원숭이가 비싼 관에 감싸여 정원에 매장된 것처럼, 원숭이를 대체하는 노리개감인 조 또한 풀장에 엎어진 시신으로 발견된다. 과거의 영광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여배우의 병적인 집착은 스스로를 살인범으로 만들며, 체포의 순간조차도 복귀 영화 '살로메'의 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노마가 보여주는 과장된 표정과 손짓, 연기는 이 여배우가 새로운 시대에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자체로 입증한다. 썩은 고기를 물어뜯으려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몰려들고, 영화계 가십을 전문으로 쓰는 칼럼니스트는 넋나간 여배우의 옆에서 신나게 기사를 전송한다. 그 칼럼니스트는 영화 '트럼보(Trumbo, 2015)'의 헬렌 미렌이 연기한 헤다 호퍼(Hedda Hopper) 본인이 맞다. 호퍼 자신도 무성 영화 시절에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배우였다. 호퍼는 무성 영화 경력을 마감하면서 영화계 주변에 떠도는 온갖 소문과 잡담을 쓰는 칼럼니스트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빌리 와일더가 그려낸 이 메타 영화(Meta-cinema)는 느와르와 로맨스, 심리 스릴러를 넘나들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인생을 재현(retrospection)하고 모방하는 영화는 결코 시들고 추한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마치 늘 새롭고 아름다운 것들을 흡혈귀처럼 끊임없이 먹어치우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생물체처럼 보인다. 글로리아 스완슨이 연기한 퇴락한 배우 노마와 영화 속 과거의 무성 영화 배우들, 영화계의 작은 소모 부품으로 존재하다 사라지는 조와 베티 같은 인물들은 거대한 영화 산업에서 생기는 부산물과도 같다. 이러한 영화 속 영화 이야기는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 같은 영화들에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빌리 와일더는 자신이 직접 겪은 영화계와 그 경험담을 토대로 무성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한 헐리우드 격변기에 대한 탐구를 '선셋 대로'로 풀어냈다. 결국 그가 파내어 팔아먹은 영화계 이야기는 빌리 와일더에게 경력의 전성기를 이어가게 했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지 못하고 주춤했던 윌리엄 홀덴에게는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 영화로 눈부신 연기를 보여준 글로리아 스완슨에게 성공은 이어지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스완슨에게 비춰지던 낙조(落照)였던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부와 명성을 가진 이 여배우에게 그다지 아쉬움은 없었을 것이다. '선셋 대로'에는 그렇게 영화와 그것과 함께한 이들의 인생, 스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비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사진 출처: framerated.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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