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khnazarov) 감독이 '우리는 재즈 피플(We Are from Jazz, 1983)'를 찍었을
때의 나이가 서른 둘이었다. 1920년대 소련의 재즈 악단 이야기를 다룬 그 영화는 재즈 음악과 코미디를 결합시켰다. 영화는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샤크나자로프 감독이 영화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가그라의 겨울 저녁(Зимний вечер в Гаграх, Winter Evening in Gagra, 1985)'은 바로 그 다음 작품이었다. 이 영화도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일종의 뮤지컬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재즈 피플'의 후속편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베글로프는 과거 탭 댄스로 명성을 날렸던 스타였으나 이제는 늙고 잊혀진 안무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 어느 날, 시골
출신의 아르카디가 찾아와 탭 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베글로프는 아르카디가 다리를 다친 적이 있고 리듬감도 없다면서
가르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아르카디는 한사코 배우겠다고 우기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조금씩 친해진다. 아내와 오래전
이혼하고, 딸과도 가끔씩 연락이나 하면서 지내는 외로운 신세의 베글로프. 그런 그에게 괴로운 일상이 이어진다. 일하던 공연단에서는
인기 여가수의 심기를 건드려 해고 위기에 처하고, 자신의 과거 공연 모습이 나온 TV 프로그램에서는 그를 이미 세상을 뜬
예술가라고 방송한다. 과연 베글로프는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이전작 '우리는 재즈 피플'에서
안무를 담당했던 탭 댄서 Alexei Bystrov가 영화 촬영 도중 세상을 떴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그 일이 마음에 남았고,
고인의 삶을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글로프'라는 캐릭터는 그렇게 해서 영화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했던 탭 댄스가 아니라, 철저히 상업적인 공연에서 뒷방 늙은이처럼 안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화려한 무대
세트와 전자 기기의 음향이 깔리는 무대에서 무용수들은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안무를 선보인다. 베글로프가 젊은 날에 공연했던 그런
무대와는 전혀 딴판이다. 개혁 개방 시대의 소련, '가그라의 겨울 저녁'은 전환기에 대중 예술 종사자들이 어떻게 생존해나가는지를
펼쳐보인다. 발레를 전공한 무용수들은 고전 발레가 아닌, 새롭고 낯선 형태의 공연을 하고 있다. 제작자는 일본에서 들여온
신디사이저에 경탄하고, 악단 연주자들은 기계에 밀려날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한다. 서서히 파고드는 서구문물과 자본주의는 예술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국가가 예술 산업 전반을 관리하고 예술가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는 시대는 끝났다. 각자도생,
베글로프는 중고 가구점에서 마음에 드는 소파를 사고 싶지만 돈이 없다. 재능이 없는 아르카디를 가르치는 이유도 레슨비 한 푼이
아쉽기 때문이다. 인기 여가수가 거들먹거리며 위세를 떠는 것도 돈의 힘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딸은 결혼식에 계부가 참석할 것이니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가족도, 돈도 없는 베글로프의 노년은 쓸쓸하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아르카디는 마치 아들처럼
여겨진다. 탭 댄스에 대한 열정을 지닌 촌구석 젊은이는 베글로프를 위해 기꺼이 나선다. 베글로프에게 화가 난 여가수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고, 방송국에 함께 가서는 정정 보도를 요구한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과거의 예술가들을 바라본다. 회상 장면으로 제시되는 젊은 베글로프의 멋진 탭 댄스 공연에는 우아함과 품위가 넘친다. 구시대의
아름다움, 그것은 베글로프가 꼭 사고 싶어하는 중고 소파를 '진짜' 가구라며 애착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새로운 시대에 과거의
예술은 낡은 것이 되고,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은 고독과 빈곤에 내몰린다. TV 프로그램에서 이미 고인이 되었다고 베글로프를 소개한
것처럼, 그는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의 노년에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영화의 제목 '가그라의 겨울 저녁'은 베글로프가 회고하는 젊은 날의 추억을 가리킨다. 어린
딸과 함께 한 휴양지 가그라에서의 공연, 그것은 늙고 가난한 탭 댄서에게 보석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전작에
이어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들려준다. 어떻게 삼십 대 중반의 젊은 감독이 스러지는 것들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영화는 개혁 개방의 파고가 거세게 들이치던 1985년, 소련의 대중 예술 산업의 한 단면을
구시대 예술가의 노년을 통해 예리하게 포착한다. 경탄이 나오는 탭 댄스 장면을 비롯해 스핑크스 세트장에서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공연, 러시아 로망스(가수들이 배우들의 목소리 대역을 했다)의 향연 또한 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fliist.com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