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본 드라마를 아주 열심히 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 현지에서 드라마가 방영되면, 그 주에 인터넷에 영상이
풀리고 자막 팀에서 자막 입혀서 나오는 시스템(?)으로 일드 팬들의 세계가 굴러갔었다. 일본 드라마에 대한 열정으로 열심히 자막
제작했던 일본어 능력자들 덕분에 일드를 잘 보았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많은 일드 팬들의 마음 속에서 고마운 존재였다.
오래전에 보았던 일드들은 그 드라마와 함께 했던 인생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절에 보았던, 내 기억 속에 남은 구식
명작 일본 드라마를 뽑아보았다.
1. 오렌지 데이즈(オレンジデイズ, 2004)
대학 졸업반 학생 5명의 이야기를 담은 청춘 성장 드라마. 이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츠마부키 사토시의 젊은 날의 모습이 참
좋았더랬다. 당시에 잘 나가던 일본 청춘 스타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시바사키 코우가 츠마부키 사토시의 상대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청각장애인 역의 시바사키 코우가 보여주는 수화는 조용조용한 수화가 아니라 극중 성격처럼 자신의 감정표현에
솔직하고 화통한 수화를 사용한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 나름의 고민을 하는 청춘의 모습을 너무 무겁지 않게, 긍정적으로 그려냈다.
2. 굿럭(GOOD LUCK!!, 2003)
항공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키무라 타쿠야, 츠츠미 신이치, 시바사키 코우, 쿠로키 히토미가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과거의 상처와
씨름하면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이 드라마에 로맨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는 것은 트라우마의
극복과 재생이다. 과거에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아낼 것인가를 두고
주인공들은 고민한다. 조종사 역을 맡은 키무라 타쿠야와 츠츠미 신이치의 연기도 좋지만, 동료 조종사 타케나카 나오토의 감초 연기는
언제 봐도 즐겁다. 윤손하도 조연으로 나온다.
3. 야마토나데시코(やまとなでしこ, 2000)
마츠시마 나나코가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로맨스 드라마. 부에 대한 선망과 허영심으로 가득한 항공사 승무원 진노 사쿠라코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짜임새 있게 그려냈다. 마츠시마 나나코의 상대역으로는 츠츠미 신이치가 나온다. 둘의 연기 호흡도
좋다. 마츠시마 나나코는 이 드라마를 통해 명실상부한 일본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한다. MISIA가 불렀던 주제곡도 기억에
남는다.
4. 런치의 여왕(ランチの女王, 2002)
이제는 세상을 떠난
타케우치 유코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드라마. 타케우치 유코가 발산하는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의 에너지는 언제나
보기가 좋았다. 늘 맛있는 점심을 먹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생각하는 나츠미가 '키친 마카로니'를 운영하는 집안에 들어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즐거운 소동을 그려냈다. 츠츠미 신이치, 에구치 요스케, 츠마부키 사토시, 야마시타 토모히사, 이 4형제가 모두 나츠미를
좋아하게 된다. 과연 나츠미의 선택은? 오므라이스 가게의 비법 '데미그라스 소스'가 드라마 내내 풍기는듯한 음식+인생+로맨스
드라마.
5. 비기너(ビギナー, 2003)
'후지 TV의 게츠구(げつく, 월요일
저녁 9시) 드라마'는 뭔가 확실한 재미를 보증하는 수표처럼 여겨졌다. '비기너'도 역시 그 게츠쿠 드라마였다. 사법연수원에
들어온 다양한 경력의 8명 신참 연수생들이 좌충우돌하며 법조인의 세계에 들어서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 드라마는
'비기너(Beginner)'라는 제목에 걸맞게 경력의 첫 단추를 꿰는 이들의 직업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매회의 에피소드에
재미와 감동이 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주 즐겁게 보았던 드라마.
6. 퓨어(Pure, 1996)
아, 이 오래된 드라마를 기억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와쿠이 에미와 츠츠미 신이치가 주연을 맡았다. 지적 장애를 가졌지만
예술적 재능이 있는 처자가 과거의 상처를 가진 신문기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 뭐 이렇게만 적어놓고 보면 그 드라마
재미있겠어, 싶지만 이 드라마야말로 내가 일드의 세계에 들어서게 해준 작품이다. 당시 화질 떨어지는 240p로 봤어도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1990년대 일본 드라마 동영상 화질은 대개가 240p였던 시절. 신작 드라마 480p는 아주 드물었고,
360p를 구하면 감지덕지했었다. 와쿠이 에미는 이 드라마에서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후 경력이 그리 잘 풀리지는 않았다.
츠츠미 신이치의 초기 경력에 해당하는 작품이지만, 배우로서의 가능성은 '퓨어'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7. 하얀 그림자(白い影, 2001)
타케우치 유코와 SMAP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연을 맡았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의사와 사랑에 빠진 간호사의 이야기.
눈물 쥐어짜내는 최루 드라마 아니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 끝이 보이는 사랑에,
주어진 시간 동안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의사 역할은 나카이 마사히로가 연기한다. 마초에다 성질도 더러운 이 의사 양반의 치명적
매력에 타케우치 유코가 끌려간다. 나카이 마사히로의 연기력에 놀랐던 작품.
8. 골든볼(ゴールデンボウル, 2002)
볼링장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드라마. 카네시로 타케시(금성무)와 쿠로키 히토미가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드라마 주연을
중년 여성 배우가 맡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쿠로키 히토미는 그걸 해냈다. 질척거리는 사랑 타령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을
주는 '스포츠 드라마'라고 해야 하나? 주연 배우를 비롯해 조연들이 맡은 배역들 모두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있어서 좋았다.
9. 모래그릇(砂の器, 2004)
작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장편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 나카이 마사히로가 주인공 와가 에이료 역을 맡아 열연했다.
자신이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음악가, 그리고 살인범을 추적하는 형사.
원작의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드라마의 흡인력을 만들어 낸다.
10.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愛なんていらねえよ、夏, 2002)
와타베 아츠로,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그야말로 '일드의 전설'이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을 작품. 여자들 갈취하며 살아가는 막장
인생 호스트 레이지. 그는 부잣집 상속녀 아코의 재산을 노리고 아코가 어린 시절에 헤어진 오빠로 접근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코는
레이지를 진짜 오빠라고 생각하며 따른다. 이 둘 사이에 일어나는 여름날의 사랑 이야기. 와타베 아츠로가 애절하게 '아코!'를
외치는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11. 섬머 스노우(Summer Snow, 2000)
토모토 츠요시와 히로스에 료코 주연의 가슴 짠한 로맨스 드라마. 당시 히로스에 료코의 연기력은 정말이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그냥 자신이 맡은 배역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동생들을 데리고 사는 청년 가장 나츠오와 심장병을 앓는
유키의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가슴 아픈 결말과 함께 Sissel이 부르는 동명의 타이틀 주제가 'Summer
Snow'도 마음에 남는다.
12. 장미없는 화원(薔薇のない花屋, 2008)
드라마 작가 노지마 신지의 작품은 관객에 따라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 극단적인 성향의 캐릭터들에다,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들이
강한 색채를 가지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의외로 '장미없는 화원'은 부드러운 노지마 신지를 보여준다.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기묘하게 결합된 이 드라마는 결말에 다가갈수록 이야기의 힘이 빠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카토리
싱고와 타케우치 유코의 좋은 연기가 그런 결함을 상쇄시킨다. 어린 딸을 키우며 꽃집을 운영하는 한 남자에게는 비밀스런 과거가
있다. 비밀과 오해, 복수극이 기묘한 무늬를 짜가며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사진 출처: mtv.tokyo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2002)'의 히로스에 료코와 와타베 아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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